주변 환경을 탓하지 마라.
절반은 환경 탓일 수도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너의 것이다.
"다른 사람 탓하면 그건 진 겁니다. 남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다 내 탓이지요."
그동안의 내 생활을 보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아 가슴이 뜨끔하다.
움직꺼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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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가 아니라 "왜"
1. 내게 있어 연구는 무엇인가?
단지 컴퓨터 비젼을 연구하는 이유가
조센세의 학생이기 때문인가.
왜 컴퓨터 비젼, 지능 시스템을 연구하고 익히려 하는가...
진심으로 즐거운가... 가슴 속 깊이 한 번 들여다 보자.
2. 이번 여름방학 동안의 공부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목표는 무엇인가?
지난 내용들의 마무리와 함께 다음판을 위한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빨리 정신차리고 전념해야 한다.
지금의 지식들이 다음판 뿐만 아니라 향후 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기간의 단축 및 효율을 극대화 시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목표는 실험 계획 완료 및 영문 저널 한 편 투고.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상이 달라보인다.
자기 한계를 규정 짓지 말아라. 한계를 그으면 거기까지 밖에 발전하지 못한다.
누가 뭐라하던 신경쓰지 말고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하면 안 될 일이 없다.
마음이 변하면 태도가 변하고, 태도가 변하면 행동이 변한다.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변한다.
바뀐 인격은 운명을 바꾸고, 운명이 바뀌면 인생이 달라진다.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발전할 수 없다.
시행착오를 겪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떨어지면 언제든 올라가면 된다.
떨어졌다고 좌절하거나 잘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갖지 말고 "왜" 떨어졌는지부터 생각하라.
불가능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안되면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왜"부터 다시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다.
재능이나 지식이 없어도 내가 가진 걸 잘 활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
실패가 많을수록 강하다.
고민이 있을 때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다.
고민을 이겨내야 한다. 집념을 가지고 할 수 있다고 믿어라.
긴 인생에서 어떻게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자나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럴때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어가라.
잔소리나 나약한 말을 뱉으면 안된다.
묵묵히 그냥 가라. 눈물을 보이면 안된다.
그 길을 걸어갈 때 인간으로서 생명의 뿌리가 깊어진다.
승부는 눈물겨운 것이다. 나 하나에 우리 가정은 울고 웃는다.
나 하나의 움직임에 가족이 웃고 운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 하나에 내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다는 절박함이 있다면 쉽게, 대충 할 수 있겠는가.
고통을 이겨내야 행복해 질 수 있다.
인생은 내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니다.
오늘일은 오늘 끝내라.
내일로 미뤄두면 진다.
하루를 살더라도 목표의식을 갖고 부딪혀라.
뒤로 넘기지 말고 그날 고민은 그날 해결하라.
기회는 언젠가 분명히 온다.
내 것을 확실히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처음 가졌던 목표를 마무리 지어 놓지 않으면 기회가 왔을 때 허둥 댈 수 밖에 없다.
연습량이 많다고 만족하지 말라.
양이 문제가 아니고 그 속에서 내 것을 찾고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는 한 번 하고나면 버릇이 된다.
할 수 있을지 걱정하지 말고 된다고 마음먹고 부딪혀라.
그른 것과 타협하지 말라.
人生에서는 시작만 있을 뿐 끝이란 건 없다.
하나를 이뤘다고 거기에 만족하면 거기서 발전이 멈춘다.
작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걸어라.
무식한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식한데 그렇지 않은 척 하는 사람은 큰 해가 된다.
참기 힘들수록 냉정하게, 가지 많은 나무엔 바람 잘 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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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김성근 장인 리더십]
장인(匠人)[명사]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심혈을 기울여 물건을 만드는것과 같다는 뜻으로, 예술가를 두루이르는말.
리더십 [leadership][명사] 무리를 다스리거나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서의 능력.
네이버 국어사전을 통해 장인과 리더십을 찾아보면 위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언뜻 두 단어 사이엔 연관성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장인’은 외골수가 먼저 떠오른다. 도자기 굽는 장인이 멀쩡해 보이는 자기를 깨부수며 괴로워하는 드라마 속 장면은
우리에게 각인된 ‘장인’의 이미지다. 광기어린 고집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곧 사람과의 불화를 의미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리더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김성근 SK 감독은 두 단어 모두에 욕심이 많다. 그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평가는 ‘장인’이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오야’(두목,우두머리라는 뜻의 일본말)다.
야구는 사람을 소재로 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야구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금질’이나 ‘조련’이라는 단어는 본래 돌이나 쇠붙이,동물 등에 쓰는 말이다.
하지만 야구에선 모두 사람을 향해야 한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지도자다.
우리 나이로 서른도 되기 전 처음 감독(마산상고.1969년)을 맡아 40년 가까이 지휘봉을 잡아 온 경험에서 나온 교훈이다.
물론 그는 선수들과도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혹독한 훈련과 냉철한 운영으로 강하게 선수들을 다그친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그의 야구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한 걸음 그에게 더 다가서 보면 다른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선수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사비를 털어 거창한 회갑연을 열어 준 것도 그의 제자들이었다.
박찬호 이승엽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도 그에게서 기술적인 도움과 함께 인간적인 조언을 받고 있다.
주위에선 김 감독과 ‘혹사’를 동일 선상에 놓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정작 선수들 입에선 그런 단어를 듣기 매우 힘들다.
그의 리더십은 물을 건너서도 힘을 발휘했다. 2년간 일본 지바 롯데 코치를 지내며 생긴 제자들도 여전히 그를 굳게 믿고 따른다. 오마쓰,다케하라 등 유망주들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 생길때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온다.
2007 한국시리즈가 열리기 전 SK 김재현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팀이 어려움에 처하면)그때가 되면 감독님이 길을 찾아주실 것이다.”
시즌 내내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벤치 신세로 밀려났던 그다. 하늘같이 높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김 감독에 대한 신뢰까지 허물어진 것은 아니었다. 둘은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언제나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살아 돌아와 준 재현이에게 고맙다”,“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어주신 감독님께 감사한다”는 말로 서로의 등을 두드려줬다.
먼 길을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에게 첫 한국시리즈 우승컵이 주어진 배경에도 역시 선수들의 감독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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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초 - '어떻게'가 아니라 '왜'부터
김성근 감독은 혹독한 훈련으로 유명하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한다.
12시쯤 식사가 차려지지만 언제 먹으란 소리가 없다.
김 감독이 맡은 팀이 스프링 캠프를 떠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사가 바로 “선수들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잊을 정도”다.
그러나 김 감독이 아끼지 않는 시간이 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1시간 씩 치러지는 미팅이 그것이다. 휴식일 전날을 빼곤 매일같이 일종의 정신교육이 이루어 진다.
명 투수 출신 한 해설위원은 이를 두고 “프로 선수들에게 그런 교육을 시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비난은 미팅의 효과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나온 것이다.
김 감독은 그 시간을 통해 ‘어떻게’가 아닌 ‘왜’를 가르친다.
내가 왜 야구를 해야하는지,왜 이렇게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시간은 항상 선수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선수들은 “너에게 야구란 무엇이냐” , “어떤 각오로 훈련에 임하고 있으며 목표는 무엇인가” 등의 항목에 답해야 한다.
김 감독은 이것을 “약속”이라고 표현했다.
감독과 선수간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말한다. “야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거의 모든 선수들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한다. 그건 내가 듣고 싶어 한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한 말이다. 글은 자기 스스로의 다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야구라면 전부를 놓고 달려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후 김 감독은 자신의 경험과 책을 통해 얻은 교훈들을 선수들에게 전해준다.
옛 중국의 명언부터 성공한 기업인들의 철학까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들려준다.
이를 위해 많은 책을 읽는데 시간을 투자한다.
책과 가까이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야구 선수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대신 알려주기 위해서다.
야구 얘기를 먼저 꺼낼때 보다 인생을 먼저 얘기하는 것이 훨씬 좋은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모든 훈련을 지휘하고 훈련 계획을 짜는 것 만으로도 짧은 것이 김 감독의 하루다.
여기에 책까지 꼼꼼히 읽으려면 그나마도 부족한 잠을 더 포기해야 하지만 김 감독은 적지 않은 시간을 독서에 투자한다.
지난 2000년 말 LG 2군 감독에 취임했을 때 일이다. 당시 김 감독은 2군 선수들을 이끌고 제주도 전지훈련을 떠났다. 물론 매일 미팅이 이어졌다.
하루는 칠판에 '一球二無' 한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야구에서 '다음' 없다는 그의 인생 철학이 담긴 말이다.
김 감독은 말했다. “너희들이 1군에 올라갔을때를 가정해보자. 어쩌다 대타를 나가게 됐다. 낯선 환경과 많은 관중, 떨릴 수 밖에 없다. 그때 상대 실투 하나를 놓치게 되면 그 타석은 끝이다. 거기서 못치면 또 2군이다. 또 언제 올라가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안타를 치느냐 못 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이것 저것 생각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반응해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하루에도 수천번씩 스윙을 하며 몸에 익혀둬야 그럴때 좋은 결과를 낼 확률이 높아진다.”
당시 선수들 속엔 현재 LG 주전 유격수인 권용관도 있었다.
그는 2000시즌이 끝난 뒤 방출 선수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권용관의 가능성을 믿고 그를 지켰다.
모든 스프링캠프가 끝나고 시범경기가 열리기 전 진주 연암대학 야구장에서 1,2군 연습 경기가 있었다.
구단주 생가가 있는 진주에서 매년 연례행사로 있던 경기다. 사실 누구도 그 경기의 승패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해에도 김재현의 투런 홈런(투수 이승호)에 힘입은 1군이 역전승을 거뒀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가 짐을 싸고 있을 때 김 감독이 권용관을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1시간이 넘도록 수비 훈련을 시켰다. 일명 ‘아메리칸 펑고’를 직접 쳤다.
몸을 최대한 뻗으며 날려야 겨우 받을 수 있는 공을 좌,우로 계속 쳐댔다.
권용관은 이날 별다른 실수가 없었다. 그러나 긴장한 탓에 평상시의 수비범위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LG 유격수는 유지현이었다. 김 감독은 적어도 유격수 수비에서만은 권용관이 유지현을 넘어섰다고 믿고 있었다.
그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권용관은 지난 겨울 언 땅을 온 몸으로 녹여내야 했다.
김 감독은 그렇게 땀을 흘리고도 정작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무대에선 움츠려들고 만 제자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권용관은 아직도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진짜 야구선수가 된 시간”이라고 당시를 떠올린다.
2007년 SK 스프링캠프서도 물론 ‘김성근표 미팅’은 계속됐다.
가득염 조웅천 등 고참 선수들마저도 “야구를 떠나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라며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물론 모든 선수들이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아니다. 뒷자리에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는 선수들도 있다.
김 감독은 굳이 그런 선수들을 불러내 꾸짖지 않는다.
김 감독은 “리더는 방향설정을 해주는 거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에게도 “기회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잡는 것”이라고 강조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받아들이지 않는 선수를 억지로 바꿀 수는 없다. 다만 받아들인 선수들의 변화가 그들을 바꿔놓는다.
고른 경쟁 분위기 속에서의 엄청난 훈련량은 곧 기술의 진보로 이어진다.
흔히 프로선수의 기량차는 백짓장 한 장이라고들 한다.
여기에 김 감독 특유의 평등주의는 맘 놓고 있던 기존 선수들에게 큰 자극이 된다.
늘 한수 아래로 여겼던 선수들이 어느새 자신을 추월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SK 한 선수는 매년 12월 가족들과 해외로 나가 개인 훈련을 해왔다.
게을리 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가족들과 함께이다보니 훈련량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마무리 캠프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말 이 선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올해는 못간다. 예약한거 다 취소해라”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가족들과 지내면 당장 내 자리가 없어질 것만 같았다. 젊은 선수들의 성장이 눈에 확연하게 느껴지는데 도저히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정말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린 것 같다.”
1회말 - 모자람을 감추려하지 말라
사람들은 김성근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부른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상대 감독이었던 김응룡 당시 삼성 감독이 “마치 ‘야구의 신’과 싸운 것 같다”고 한데서 시작된 호칭이다.
그러나 정작 김 감독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젔는다.
“야구는 인생과 같아서 끝을 알 수 없다. 계속 배워야한다”이라는 것이 ‘야구의 신’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괜한 겸양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야구를 더 알고 싶어한다. 엄청난 독서량도 그 때문이다.
그의 집엔 엄청난 양의 야구 관련 서적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스스로도 “수백권이 넘는 건 맞는데 다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할 정도다.
그의 야구를 무조건 ‘일본식’으로 단정하기 힘든 이유도 여기 있다.
솔직히 그의 야구와 메이저리그식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몇 년 전 우연히 감독의 방을 찾았을 때 마조니 볼티모어 투수코치의 책을 놓고 연구하고 있는 모습을 본 뒤에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
정답에 가깝게만 갈 수 있다면 가리는 것이 없다.
실제로 김 감독은 자신이 영향을 받은 감독으로 모리(전 세이부) 노무라(라쿠텐) 등 일본 감독들과 함께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감독을 꼽는다.
그는 자신의 모자람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눈과 귀,그리고 마음을 열어둔채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는 늘 그런 자세로 출발점에 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인스트럭터가 오면 가장 먼저 각 훈련장을 돌며 지도 방법을 관찰했다.
어떻게 가르치는지가 주된 관심사. 그들의 방식에 자신의 노하우를 더해 보다 나은 방식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당시 수비쪽 인스트럭터를 맡은 사람인 ‘지코’라는 이름으로 정도만 기억되고 있는 쿠바계 코치였다.
김 감독은 수비 훈련을 지켜보다 큰 실망을 했다. 가장 기초적인 것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거라 여겼었기에 실망은 더욱 컸다. 이후 수비쪽 훈련장은 전혀 찾지 않았다.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김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다 뜬금없이 그때 얘기를 꺼냈다.
“가끔 그때 배우지 못한 걸 후회할때가 있어. 그냥 기본기만 맨날 가르치길래 별거 없다고 여겼는데 지나고 보니 거기에 길이 있었던 거야.
그때 잘 배워뒀으면 수비도 더 자신있게 가르칠 수 있을텐데... 아쉬워.”
그의 평소 지론과 닿아 있는 얘기다.
김 감독은 “무식한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식한데 그렇지 않은 척 하는 사람은 큰 해가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오만과 자만을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야인 시절 코치 2년차이던 김용수 당시 LG 2군 투수코치에게 언더핸드 투수 조련법에 대해 조언을 구한 적도 있다.
우연히 보게 된 2군 경기서 언더핸드 우규민의 투구가 너무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묻는다고 진짜 진지하게 가르쳐줄지는 몰랐다”는 농담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지만
이후 선수들을 지도할 때 김 코치의 이론을 분명히 참고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끊임없이 진화한다. 이전까지 가르쳐왔던 것 중 틀린 것이 발견되면 곧바로 더 나은 것을 받아들인다.
김 감독이 SK 감독으로 취임한 뒤 시작된 제주 가을 캠프때 일이다.
LG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노석기 전력분석팀 대리가 고개를 저으며 필자에게 다가왔다.
“희한하네요. 감독님이 타자들 가르치시는게 변했어요.”
쉽게 표현하면 이전까지 김 감독은 치는쪽 팔(우타자의 왼팔)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2005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2년 뒤 그 반대쪽 팔의 움직임과 팔목 사용을 좀 더 강조하는 스타일로 변신(?)해 돌아왔다.
변화의 이유를 묻기가 조금 조심스러웠다.
LG 감독 시절 이미 ‘야구의 신’이라고 불렸던 감독 아닌가. 변화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시가 틀렸음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거침없이 답했다.
“일본에서 승엽이를 가르치면서, 또 그쪽 코치들과 선수들,수준높은 용병들의 치는 모습을 보며 또 새로운 걸 느끼게 됐지.
사람은 늘 변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거야. 갖고 있는걸 버리는 건 쉽진 않아.
하지만 그걸 두려워하고 감추려하면 계속 그 자리서 멈출 수 밖에 없잖아.”
SK가 올시즌 8개구단 중 가장 많은 홈런(112개)를 때려낸 것과 절대 무관하게 볼 수 없는 진화다.
김 감독은 팀을 맡으면 일본인 코치들을 대거 기용한다.
주위에선 이를 놓고 말들이 많다. 그가 야구계에서 견제받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 코치 자리도 많지 않은 현실에서 일본에서 건너 온 코치들이 곱게 보일리 만무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명이 모이면 그 중 한명은 내 스승이 있다고 하지 않나. 잘 보고 뭐가 다른게 있는지 발견해낼 생각이나 하라”며 소신껏 밀어부친다.
김 감독은 올시즌 일본인 코치와 보직이 겹치는 코치들도 1군에 합류시켰다. 때문에 미등록 1군 코치들이 적잖이 생겨났다.
상대가 신경전을 벌일때면 덕아웃에서 나가달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물론 김 감독은 눈 하나 깜짝 않는다. “모양새보다 잘 보고 발전하는게 먼저다. 그래야 우리가 나중에 그들에게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시리즈 기간 동안 박철영 SK 배터리코치는 가토 투수코치의 통역 역할을 했다. 한.미.일 3개국어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코치 입장(그는 미등록 코치다)에선 내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흔연한 낯으로 코치와 통역을 병행했다.
그는 LG 시절부터 김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사이다. 아마도 감독의 생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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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초 - 두려움의 미학
김성근 감독은 겁이 많다. 특히 야구에 대해 그렇다.
‘야구에선 겁쟁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은 늘 까맣게 타 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무너진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김 감독은 새로운 팀을 맡거나 새로운 시즌이 시작할때면 언제나 “큰일났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2002년 LG 정식 감독에 취임했을 때도, SK를 맡은 뒤에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당시 주위에선 “제자(조범현 현 KIA 감독)가 맡았던 팀인데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조 감독이 뭐가 되냐”고 수근거렸다.
김 감독은 진심이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그의 한 측근은 “첫 훈련이던 제주 캠프가 시작되고 며칠 뒤 감독님께서 “아직 계약서에 사인 안했는데 그만두면 안될까”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SK 전력에 그만큼 구멍이 많다며 괴로워하셨다”고 털어놓았다.
SK는 그동안 그가 맡았던 팀 중에선 가장 좋은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태평양,쌍방울,LG 등은 그야말로 전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맡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여전히 “두렵다”는 말로 출발선을 나섰다.
김 감독은 그러나 두려움을 외면하거나 잊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한 준비를 통해 그 간극을 줄여나간다. ‘두려움’에 대한 그의 반응은 외부에 알리기 위함이라기 보단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둬야만 팀이 위기를 맞았을때 구렁텅이까지는 빠트리지 않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전문가들은 저마다 예상평을 내 놓는다.
나름 야구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의 지적이지만 정작 현장에선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한다.
김인식 한화 감독은 얼마 전 “전문가란 사람들이 어찌 그리 못 맞히는지 모르겠다”고 농반 진반의 타박을 한 바 있다.
대부분 팀의 긍정적 요소를 평가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즌은 정작 희망대로만 풀리지 않는다. 예상 외의 부상이 나오고 믿었던 선수들의 슬럼프가 생길 수도 있다.
현장의 감독까지 이같은 ‘겉핥기 식 희망사항’으로 시즌 구상을 했다간 실패 확률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김 감독은 바로 언제나 가장 부정적인 전망에 초점을 맞추고 시즌을 준비한다. 부상이 있는 선수들은 전력에서 일단 제외해 둔다.
선수들의 페이스에도 매우 짜게 점수를 매겨놓는다.
지난해 3할을 친 선수라 할지라도 최근 흐름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해 반짝 할 수준의 선수는 아닌지 면밀히 따져본다.
때문에 차선이 아니라 차차선까지 준비해 둔다.
불안한 마음을 술이나 취미 생활로 잊으려 하지 않는 대신 철저한 준비로 그 요소를 하나씩 줄여가는 것이다.
2006년 11월 제주도 가을 훈련이 시작될 즈음 김 감독의 SK에 대한 전력구상을 살짝 들여다보자.
우선 채병룡과 신승현은 일찌감치 전력 외로 쳤다. 둘 모두 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다른 선수들만으로 판을 짰다.
타선도 그렇다. 박재홍 김재현 등의 페이스가 분명 전성기와는 다르다는 기준을 갖고 들어갔다.
이때만해도 이호준의 합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김 감독의 계산법 대로라면 기존의 원,투 펀치와 중심타선이 모두 허물어져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당연히 “큰일 났다”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채병룡과 신승현을 대신할 선수를 키워내거나 영입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외국인 선수를 투수 두명으로 가져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재홍 김재현 등의 빈자리는 젊은 선수들의 육성에 승부수를 뒀다. 조동화 김강민 박재상,여기에 최정이 그 후보로 떠올랐다.
이후 강력한 담금질로 이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데 박차를 가했다. 1루수 요원인 박정권 김재구까지 외야 훈련을 시키며 대비했다.
시즌이 모두 끝난 현재 시점에서 따져보면 김 감독의 ‘슬픈 예감’ 중 틀린 것은 채병룡 하나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채병룡의 가세가 SK에 가져다 준 효과다.
만약 김 감독이 채병룡을 전력으로 생각해뒀다면 부족했던 퍼즐 하나를 끼워넣는 수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없다고 생각한 선수가 가세하게되니 그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조범현 신임 KIA 감독은 SK의 2007 시즌 성공에 대해 가장 냉정한 분석이 가능한 인물이다. 바로 직전까지 SK를 이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조 감독은 2007시즌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2006시즌이 시작되기 전 투수 이승호와 엄정욱의 몸상태에 대해 여려차례에 걸쳐 확인 작업을 했다.
트레이닝 파트에선 ‘무조건 된다’고 했고 결국 마지막에 가선 나도 믿었다. 결국 그 부분에서 펑크가 나며 어려운 시즌을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김성근 감독님만큼의 대비는 하지 못했던 셈이다.
나를 비롯해 젊은 감독들과 확실히 차이가 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김 감독의 자신의 불안감이 선수단에 전염되는 것은 철저하게 막는다.
LG 감독이던 2002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그는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주위에선 우리를 꼴찌 후보라 말한다. 그러나 그건 진짜 우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땀은 반드시 대가를 가져온다. 안되면 내 힘으로라도 4강까지 이끌테니 각자의 능력만 최대한 발휘하면 된다.”
2007시즌 전 SK 선수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 선수들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자신이 해내기 위해 하루 24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며 데이터와 씨름을 한다.
김 감독은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지은 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묻는 질문에 “한화와 개막전”이라고 답했다.
당시 김 감독은 투수 교체 타이밍을 놓쳐 다 잡았던 경기를 무승부로 마친 바 있다.
김 감독은 얼마 전 당시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바 롯데 첫해엔 감독 시절의 집중력이 이어졌다.
이승엽에게 투수의 버릇 등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경기 매 순간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듬해엔 넓은 관점에서만 경기를 지켜봤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감이 확실히 떨어져 있더라. 이겨내려고 많은 애를 썼고 5월이 다 지나고서야 예전의 감이 돌아왔다.
개막전서 우리가 이겼다면 일찌감치 바람을 타며 여유있는 시즌을 보냈을텐데... 선수들이 나 때문에 안해도 될 고생을 한 셈이다.”
그는 한국시리즈 우승 후 가진 언론 인터뷰서도 “겁이나는 것은 감독도 경기중 집중력이 끊어지는 것이다. 경기 중 단 한순간이라도 놓칠까 두렵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두려움은 단순히 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선수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를 향해 휘두르는 채찍인 셈이다.
2회말 - KS 발야구 공포증 극복기
2007년 김성근 감독에게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두산’이었다.
두산은 결국 마지막 승자로 남아 SK와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놓고 마지막 승부를 펼쳤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가장 큰 고민은 두산의 ‘발’이었다. 김동주를 축으로 한 중심타선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건 두 번째 문제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서 삼성 이승엽을 철저하게 막아낸 예에서 알 수 있듯, 단기전서 타자를 막는 방법에 대해선 나름의 노하우가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엽에게도 마지막 순간,결정적 홈런을 맞았고 당시 4번 마해영을 봉쇄하는데는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승부는 조금 미뤄둘 수 있었다.
발은 달랐다. 전혀 차원이 다른 공격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산의 발은 상식을 뛰어넘는 질주라는 점에서 계산 속에 집어넣기 너무도 힘든 존재였다.
김 감독은 또 한번 두려움을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두산의 발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구상했고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필자는 김정준 SK 전력분석팀 과장의 도움을 받아 두산의 발야구를 막기 위해 동원됐던 SK의 준비사항을 다시 짚어봤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김 감독이 얼마나 철저하게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는지 조금은 느껴볼 수 있다.
우선 SK 전력분석팀은 일찌 감치 ‘두산 육상단’을 이끄는 세명의 발,이종욱 고영민 민병헌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보통 전력분석팀이 원정 기록에 나서면 상대 투수에 포커스를 맞춰 촬영을 한다.
그러나 SK는 방법을 달리했다. 백네트 뒤에서 투수 뿐 아니라 주자의 움직임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8월 중순 무렵부터다. 뛸 때와 그렇지 않을때의 동작 차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두산의 1년치 기록지를 모두 분석했다. SK전 뿐 아니라 두산이 치른 모든 경기에서 주자의 도루 사항을 면밀히 분석했다. 이를 통해 볼 카운트 별,투수 별, 점수 상황별로 세분해 두산의 발이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파악했다.
김 감독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그만큼 빠르고 냉정하게 판세를 분석하고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김 감독은 물론이고 전력분석팀은 밤을 세워 숫자와 그 속에 흐르는 경향을 분석했다. 마치 SK 텔레콤의 ‘24: hours T’를 떠올리게 하는 밤의 연속이었다.
SK가 이를 통해 알아낸 것이 몇가지 있었다. 우선 주자별로 견제구 숫자에 따라 뛰는 경향을 발견했다. 두 번 온 뒤에 뛰는 선수가 있는가하면 심지어 세 번까지는 기다리는 선수도 발견해낼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피치드 아웃 효과다. 두산 타자들이 피치드 아웃을 하면 다음 공에는 맘 놓고 뛰는 경우들이 많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파격적인 두개 연속 피치드 아웃이 나왔던 배경이다.
마지막으로 주자들의 버릇을 알게 됐다.
특히 민병현의 경우 1루에서 뛸 때와 그렇지 않을때 팔의 위치가 달랐다. 뛸때는 팔이 내려왔지만 반대의 경우 가슴 쪽으로 모아놓아 놓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2차전서 7회 가득염이 민병헌을 견제구로 솎아낸 장면은 견제구 수에 따른 변화와 그의 버릇이 더해져 거둔 성과였다.
상대를 알았으니 이제 내부 단속에 나설 차례였다. 우선 SK 투수들의 버릇 찾아내기에 나섰다. 홈으로 던질 때와 견제할 때 차이가 나는 것은 없는지 숨은 그림 찾기에 들어갔다. 이 중 김성근 감독이 찾아낸 대표적인 예가 채병룡의 습관이었다. 턱의 위치에 따라 견제와 투구의 경우가 달라진다는 걸 발견하고는 즉시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또 혹 있을지도 모를 사인 누출을 막기 위해 포수 박경완이 최대한 무릎을 좁힌 상태에서 투수와 의견을 교환하도록 지시했다. 김정준 과장은 “비디오로 보면 나와도 실전에서,특히 젊은 선수들이 그걸 다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두산 1,3루엔 김민호 김광수 등 주루 센스가 빼어난 코치들이 포진해 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SK의 1,2차전 패배는 오히려 약이 됐다. 특히 1차전이 그랬다. SK는 1차전은 내줄 수도 있는 경기라 여겼다. 특급 에이스 리오스가 등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이지만 1차전서 SK는 과감하게 준비했던 보따리를 풀 수 있었고 결국 이후 시리즈를 유리하게 끌고가는 기폭제가 됐다.
SK는 1차전서 이종욱을 잡기 위해 한 타석에서 두개 연속 피치드 아웃을 하는 모험을 했다. 평소보다도 견제구를 하나 이상 더 던졌다. 결과적으로는 이 경기서 주자,특히 이종욱을 잡는 것은 실패했다. 이종욱은 2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SK 입장에선 볼카운트가 불리해지며 견제 후 호흡이 흐트러지는 등 악영향만 남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차전 패배 후 김성근 감독은 자신있게 말했다. “이제 두산 선수들이 맘 놓고 뛰지 못할 것이다.”
김 과장은 이에 대해 “우리는 시즌 중 단 한번도 피치드 아웃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차전서만 4개가 나왔다. 한국시리즈서 이전과 다른 과감한 움직임을 보이자 두산 선수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결과를 떠나 우리가 노렸던 것이 이 점이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면 그만큼 느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SK는 2차전서는 3인방에게 단 하나의 도루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고영민과 민병헌을 한번씩 잡아내는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3차전이 열리기 전, 김성근 감독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발을 잡기 위한 작전은 쓰지 않는다. 2사 이후 주자에만 신경 쓰면 된다. 타자와 상대에만 집중하라.”
김 과장은 “두산 빠른 주자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줬다는 확신이 있었다. 또 김동주를 묶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발에 대한 우리 투수들의 부담이 적어질 수 있었다. ‘줘봐야 한점’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3차전부터 우리 투수들이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물론 준비는 SK만 한 것은 아니다. 두산도 이에 못지 않은 대비가 있었다.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기습 번트에 대한 대비였다. SK는 고영민의 수비 위치가 뒤에 위치한 점,1루수 안경현의 수비 폭이 넓지 않은 점을 감안해 전 선수들에게 우측 방향의 번트를 반복 훈련했다. 틈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산은 일찌감치 이에 대한 대비가 돼 있었다.
김재현은 2차전이 열리기 전 선수들에게 “내가 타석에 들어서니 (김)동주가 번트 대비하라고 수비수들에게 사인을 보내더라. (안)경현이형도 준비자세를 하고 있었다. 역시 만만치 않다”며 답답함을 털어놓기까지 했다. 2차전까지의 기 싸움에서 두산이 우위를 차지했던 한 이유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습번트 무산은 SK쪽으로 유리하게 작용 됐다. 이후 SK는 적극적인 공격성향 야구를 펼쳤고 이것이 타선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중요 포인트가 됐다.
*덧붙이기 : 김정준 과장은 SK가 한국시리즈서 세웠던 전략을 털어놓는 이유에 대해 “한국시리즈의 전력은 이제 과거일 뿐이다. 어차피 6개월 후 새로운 판에서 다시 경쟁을 해야 한다. 독자들이 야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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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초 - 즐기는 리더의 힘
김성근 감독은 재일교포 2세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마쳤다.
그리고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단 두 줄의 사실만으로 가설이 줄을 잇는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 같은 가설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 일이 좀 있었다. 하지만 이후엔 글쎄...”
초등학교 시절 김 감독은 주위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10여명에게 둘러 쌓여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그러나 6학년때 학교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던 학생과 1대1로 맞붙어 이긴 뒤론 맘 편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 이후론 오히려 학교의 주류세력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한국 사람이란 걸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알아도 굳이 문제삼지 않았다.
고3때 재일교포 선수단에 포함돼 한국을 다녀 온 뒤에는 전교생이 다 알게됐지만 불편했던 기억은 없다.
지금은 잘 상상이 안되지만 중학교 땐 학교 연극의 주연으로 나선 적도 있고 고등학교땐 축제 사회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가 중심에 서는 것에 대한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김 감독을 잘 따랐다.
그에 대한 호칭만 봐도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친구들은 그를 “가네바야시(金林)상”이라고 불렀다.
‘상’은 상대롤 존중하는 뜻에서 붙이는 호칭이다. 친근한 사이끼린 ‘짱’을 붙인다. 이승엽(요미우리)은 동료들에게 “승짱”이라고 불린다.
가쓰라 고교시절 학교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부임해 첫 수업을 들어왔다.
김 감독은 선생님을 골려주기로 마음먹고 “전부 운동장으로 나와. 오늘 수업은 제낀다”고 소리치며 교실문을 나섰다.
모든 학생들이 그를 따라 1시간을 신나게 놀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그 시간동안 선생님은 홀로 교실에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싸움을 잘해서 였을까.
“초등학교 이후론 치고 박고 싸워본 기억이 없다.”
공부를 잘했나.
“10등 안에는 들었는데 아주 잘한 편은 아니었다.”
덩치가 컸나.
“고등학교때 우유배달을 하며 부쩍 컸지만 중학교때까진 5번 이하였다.”
야구 최고 스타였군.
“그리 신통한 실력은 아니었다. 공은 빨랐는데 제구는 별로였고 발도 느려 눈에 띄지 못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그의 주위에 사람을 모이게 했던 것일까.
김 감독도 일단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한참을 생각해보더니 “그냥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생활은 고단했다. 도시락에 밥은 있었지만 반찬을 싸갈 형편은 되지 못했다. 맨밥에 간장을 뿌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친구들에게 보이기 민망해 뚜껑을 조금만 열고 밥을 떠먹곤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야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했고 생선가게,공사판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즐거웠다.
우유배달을 하며 공짜 우유를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았고 온 몸엔 생선 냄새가 뱄지만 가끔씩 받아 든 두툼한 생선 몸통이 반가웠다.
가난은 귀찮았지만 일을 할때도 괴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유를 빨리 돌릴 수 있을까’ , ‘생선뼈를 쉽게 버리는 방법은 뭘까’를 고민했고 하나씩 나아질때마다 그 성취감을 즐겼다.
지금은 생명과도 같은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공터에서 공놀이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공을 던지고 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재미가 있으니 힘든 줄도 몰랐다. 나아지는 자신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한번은 좌익수 앞으로 라이너로 안타성 타구를 날리고도 1루에서 아웃된 적이 있었다. 발이 워낙 느렸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경기 후 학교 육상부를 찾아갔다. 주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발이 빨라질 수 있냐.” 육상부 주장은 “내리막길을 뛰어보라”고 권했고 그길로 쉼 없이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달렸다.
이후 좌전안타를 치고 1루서 아웃되는 일은 사라졌다.
김 감독은 “야구가 즐겁다보니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고 했다면 그렇게 많이 뛰지 못했을 것”이라며
“선수들에게 야구를 즐기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즐거우면 귀와 마음이 열리고 더 잘해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움이 전염됐을 터. 장난은 재미있고 야구는 할수록 늘었으니 주위에 사람이 모일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따르는 선수들은 하나같이 ‘열정’을 말한다. “김 감독의 열정을 보면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열정은 즐기는 자에게서 나오는 에너지. ‘리더 김성근’의 비결은 즐거움일런지도 모른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김 감독은 LG에서 해임됐다. 분노와 회한이 가득했던 그 즈음 일본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교토 노인리그에 우리 학교(가쓰라 고교)가 참가하고 있는데 에이스가 없어 고전중이다. 빨리 건너와라. 우리 팀 목표는 우승이다.”
김 감독은 그날 해임 사태 이후 두 번째로 크게 웃었다. 처음은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연때였다.
3회말 - 같은 실패는 반복하지 않는다
김성근 감독은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40여년의 감독 생활 중 운동장에서 울어본 것은 딱 두 번. 충암고 감독시절이던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서 신일고에 패했을 때,
그리고 2002년 한국시리즈서 6차전 삼성에 역전패를 당하고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김 감독은 아직도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가끔씩 “그때 조범현(KIA 감독. 당시 주전 포수)이 마스크로 땅을 치며 “이제 우리 대학 우찌 가노,우찌 가노”하며 우는 걸 보니 마음이 무너지더라” , “이동현이가 6차전 던지고는 탈진으로 쓰러져 라커에 누워 있었어. 9회 역전을 당하고 갑자기 서럽게 우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라며 회상에 잠기고는 한다.
고된 훈련을 버텨내며 많은 땀을 흘린 선수들에게 미안해서다.
그 어느때보다 많은 땀을 흘리며 이기기 위해 노력했던 선수들이었기에 그들의 눈물은 김 감독의 가슴을 세차게 후벼팠다.
그러나 김 감독은 눈물을 흘려버리지 않았다. 가슴 속에 고이 묻어둔 채 조용히 칼을 갈았다.
한번의 실패가 두 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지막 경기가 끝나는 순간 홀로 다시 출발선에 섰다.
시작은 패인 분석부터였다.
▲77년 황금사자기 - 김 감독은 우선 에이스 기세봉이 열흘 이상 계속되는 대회를 버텨낼 수 있는 체력이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기세봉은 신일고전서 9회 1아웃 까지 노히트노런으로 잘 던지다 2아웃을 남겨놓고 3점을 내줘 패전투수가 됐다.
이후 기세봉에게는 기술 훈련보다는 힘 있게 공을 던질 수 있는 체력 위주로 프로그램을 짰다.
그렇게 던지게 하진 않았지만 목표는 ‘6경기 모두 완투가 가능한 수준까지’였다.
두 번째는 분위기 전환이었다. 당시 충암고는 야구부가 해체된 대건고 출신 선수들과 기존 선수들의 연합팀이었다.
이기는 것 보다 지는 것이 익숙했던 만큼 당대 최강 전력이었던 신일고는 이름만으로도 주눅이 들게 했다.
거기에 다 잡았던 경기를 놓쳤던 아픔까지 더해졌으니 어린 선수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김 감독은 봉황기를 준비하며 짬짬이 선수들에게 즐길 시간을 줬다. 산으로 계곡으로 찾아다니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쁜 기억은 빨리 잊게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 중 쓴소리도 가급적 자제했다.
전략에도 변화를 줬다. 충암고는 봉황기서 다시 신일고와 맞붙었다. 팽팽한 승부는 하루를 넘겨 이튿날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이어졌다.
다음날로 미뤄진 경기서 충암은 1사 2루의 기회를 잡았다. 김 감독은 이때 히트 앤드 런을 지시했다.
2루에 주자를 놓고 히트 앤드 런 사인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또 무모함 보다는 신중함을 선호하는 김 감독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작전이었다.
김 감독은 그 이유를 “선수들의 공격적 성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신일고라는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벤치에서 선수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암고가 말 공격을 하고 있었던 만큼 ‘이번에 안되면 다음도 있다’는 계산도 함께 깔려 있었다.
김 감독의 마음이 선수들에게 전달된 것이었을까. 결국 충암고는 신일고를 물리쳤고 그 대회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2002년 한국시리즈 - 당시 LG는 4강에 오른 팀 중 가장 허약한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이기기 위해선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불펜을 충분히 활용하는 전략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준 플레이오프서 현대를 꺾었고 우승 전력으로 꼽혔던 KIA는 5차전까지 가는 혈투끝에 물리쳤다.
그러나 잃은 것도 있었다. 선수들,특히 불펜 투수들의 부하가 너무 심하게 걸려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전력분석을 바탕으로 막강 삼성 타선을 잘 막아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힘이 부칠 수 밖에 없었다.
5년이 흘러 2007년 한국시리즈. 가을 잔치에 다시 서게 된 김 감독은 마운드 운영 방식을 달리하기로 결정한다.
우선 SK 선발 투수들의 스테미너가 4일 텀(3일 휴식 후 등판)을 버티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또 2002년처럼 불펜 투수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선 선발 투수들이 가능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줘야 하는데 3일 휴식으론 무리가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4인 로테이션이다.
포스트 시즌은 3인 선발 체제로 꾸리는 것이 대세로 여겨졌다.
1992년 롯데가 윤학길 염종석 윤형배로 이어지는 3인 선발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또 한번의 파격 아닌 파격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야인 시절의 경험도 큰 도움이 됐다. 김 감독은 2002년 LG에서 해임된 뒤 2년간 스포츠 투데이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김 감독은 “그때 포스트시즌을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보며 많은 공부가 됐다”고 했다.
가장 큰 교훈은 큰 경기서 모든 불펜 투수들이 매일같이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김 감독은 “우리(SK)가 페넌트레이스에선 6명,7명씩 투수를 쓰며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한국시리즈서도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것들을 종합해 보고 내린 결론이었는데 결과가 좋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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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초 - 참기 힘들수록 냉정하게
SK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다음날.
EBS 라디오에서 ‘세계 음악기행’을 진행하는 성기완씨는 김성근 감독과 연관이 있는 자신의 중학생 시절 경험담을 얘기했다고 한다.
방송을 들은 팬이 한 야구 게시판에 올린 글에 따르면 성기완씨는 자신의 충암중 선배(당시 충암고 야구선수)로부터
“김 감독이 훈련 중 한 선수의 배트에 입을 맞고 쓰러졌다. 앞니가 다 빠질정도의 충격이었지만 김 감독은 선수를 혼내지 않고 “네 스윙 궤적 안에 들어가 있던 내 잘못”이라고 위로하더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야구의 신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성기완씨의 기억은 정확하다. 실제로 김 감독의 앞니는 모두 틀니다.
당시는 충암고가 황금사자기 8강전서 신일고에 패해 와신상담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 감독은 한 선수를 집중 지도하고 있었는데 너무 몰입 했던 탓에 자신이 조금씩 그 선수쪽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러다 알루미늄 배트의 사정권(?)까지 들어가게 됐고 결국 사고가 터진 것이다.
김 감독은 “왜 화가 안 났겠어. 이가 빠진 것은 둘째치고 입이 금세 부어오르고 통증이 너무 심해 엄청 괴로웠지.
하지만 놀란 아이의 얼굴을 보니 화를 낼 순 없었어. 특히 그때 분위기는 더 그러면 안됐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의 말 한 ‘그때 분위기’란 당시의 충암고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당시 충암고엔 더 큰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김 감독의 부상은 사고 축에도 못 들 정도였다.
황금사자기가 끝난 뒤 충암고 선수들은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전국대회 4강=대학 입학’이라는 족쇄 때문이었다. 워낙 충격적인 패배였기에 어린 선수들의 동요는 매우 심했다.
스트레스는 곧 이상 행동으로 이어졌다. 충암고 선수들끼리 난투극이 벌어져 한명이 머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먼저 터졌다. 얼마 뒤에는 선수들이 술을 마시다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도 또 한명이 다쳐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김 감독은 그때마다 경찰서로 불려다녀야 했다. 사건이 진정된 뒤에는 매일같이 3군데 병원을 오가야 했다. 자신의 치료를 위해, 또 입원한 두명의 선수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선수들 이상으로 황금사자기 패배가 아팠던 김 감독이었기에 당시 연이은 사건들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선수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리더는 위기가 닥칠 수록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시리즈 ‘3회말’에 언급했던 것처럼 산과 계곡으로 선수들을 몰고 다니며 가슴 속 응어리들을 풀어주려 애를 썼다.
김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선수들을 많이 혼내. 예전엔 때리기도 했었지. 하지만 철칙이 하나 있어.
술먹고 때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거였어. 때리는건 야구를 잘 하게 하기 위해서지 감정이 앞서면 그건 폭력이잖아.
아버지가 아들 때릴때 감정으로 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야. 사고가 났을때 리더가 흥분해서 날뛰면 애들은 그걸로 끝이난다고 생각해.”
쌍방울 감독 시절의 경험담에서도 그의 ‘리더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서울 원정길에 오른 김 감독은 그날도 밤 늦도록 데이터를 연구하며 다음날 경기를 대비하고 있었다.
밖이 좀 소란해지는가 싶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쌍방울 원정 숙소로 조직 폭력배들이 들이닦친 것이었다.
폭력배들은 “A 선수를 당장 내놓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이유가 더 황당했다. A선수가 그 조직 보스의 애인과 몰래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구 감독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 감독이 직접 나선 뒤에야 겨우 사태가 진정됐다. 물론 A선수는 끝까지 숨겨놓고 있었다.
김 감독은 “그땐 정말 무섭더라”며 너털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당시 속 마음이 어땠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A선수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야구 선수가 어떻게...’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 기분만으로 선수를 몰아친다면 선수 생명은 물론 인생까지 막장으로 곤두박질 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홀로 분을 삭였다.
그는 여전히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식은 선수라면 모를까 하고자 하는 선수에겐 어떻게든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믿고 있다.
*덧붙이기 : 김 감독은 고등학교 감독 시절 선수들을 집으로 데려가 금값같던 소고기로 직접 ‘샤브샤브’요리를 해주기도 했다. 충암고 시절 계곡으로 놀러다닐때는 그 횟수가 더욱 늘었다.
그때 익힌 솜씨 덕분에 지금도 ‘샤브 샤부’요리엔 자신을 갖고 있다.
개포동에 있는 그의 단골 ‘샤브 샤브’집은 김 감독의 조언을 받은 뒤 손님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후문이다.
홀 서빙을 하는 한 아주머니의 반응이 재미있다.
“사장님이 계속 감독님이라 부르며 지적을 받으시길래 난 식당 감독을 하시는 분인 줄 알았다. 감독님은 우리 가게서도 감독님이다”
4회말 - 말괄량이 길들이기①
서른살도 되기 전부터 시작된 감독 생활이 이제 어언 40년에 다다른다. 그만큼 숱하게 많은 선수들의 그의 손을 거쳐갔다.
가지많은 나무엔 바람 잘 날 없다는 것이 인생의 이치. 김성근 감독에게도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선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그런 선수들도 쉽게 내치지 않았다. 물론 그도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선수가 포기하기 전까진 절대 그의 마음을 닫지 않았다.
시즌 중 KIA 김진우가 잠적을 감췄을 때 김 감독은 매우 안타까워 했다. 한국야구사를 다시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 선수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야구를 그만둔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당시 “가능하다면 내가 한번 만나보고 싶어. KIA에서도 애를 써 봤겠지만 말야.”라고 말했다.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걸까.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시리즈 ‘1회초’에 언급했듯이 선수들의 정신무장을 새롭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김 감독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의 답은 의외였다. “말을 해주긴 뭔 말을 해. 그냥 들어주는거지. 만나게 되면 한 일주일동안 내내 술을 같이 먹어줄 생각이야. 말 하고 싶으면 하게 하고 하기 싫으면 술만 먹고. 도망가는 사람은 외로워서 그런 경우가 많거든.”
그동안 말썽쟁이 선수들을 가르치며 얻은 노하우에서 나온 말이다. 리더야 말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리더가 먼저 마음을 닫으면 진심으로 혼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응징’이 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김 감독은 “기본적으로 야구 선수들은 착해. 말썽피는 애들이 오히려 여린 경우가 많아. 진짜 걱정해주면서 얘기를 들어주면 순한 양이 된다고”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태평양 감독 시절 정명원(현 현대 코치)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야구선수 중 착한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고운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너무 착한 것이 문제였다. 하루는 고된 훈련을 참지 못하고 도망가겠다는 친구를 따라 숙소를 이탈한 적이 있었다. 결국 며칠만에 잡혀왔고 김 감독의 집을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도 몇차례 비슷한 일들이 있었던 터다.
김 감독은 말 없이 집을 나섰다. 그 뒤엔 정명원이 머쓱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따라오고 있었다. 한참을 걷는 동안 아무도 말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김 감독이 불쑥 동네 문방구로 들어갔다. 김 감독은 일기장과 볼펜 몇자루를 사더니 정명원에게 건넸다.
왜 주는지 뭘 하라는 건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번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정명원도 역시 따라 들어갔다. 맥주 몇병을 주문하더니 또 말이 없다. 잔에 술을 부어주고 “마셔”가 전부였다.
잔이 비면 술을 다시 따라줄 뿐 김 감독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정명원은 어색하게 계속 술만 들이켜야 했다.
시킨 술이 다 떨어질 때 쯤 김 감독이 드디어 하고픈 얘기를 꺼냈다.
“너 오늘부터 이 일기장에 매일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써. 너한테 야구가 뭔지, 왜 야구를 하는지도 쓰고 훈련이 어땠는지도 써 봐.
가끔씩 내가 읽어줄테니까.”
그걸로 끝이었다. 한바탕 크게 혼날 것을 각오했던 정명원은 한참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내 김 감독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이후 정명원은 매일같이 일기장을 써내려갔고 김 감독과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물론 그 이후 정명원은 단 한번도 사고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리즈 첫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대투수로 성장했다.
해태(현 KIA) 2군 감독시절엔 임창용이라는 투수를 만났다. 그 역시 아주 빼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다. 김 감독은 욕심이 났다.
하지만 임창용은 좀처럼 그물 속에 들어와주질 않았다. 지각은 다반사였고 걸핏하면 훈련을 빼먹었다.
김 감독은 정명원과는 다른, 그러나 결국에 원하는 바는 같은 전략(?)을 썼다.
그리고 기다리던(?)그 날이 왔다. 임창용은 3일간 무단으로 팀을 이탈했다가 슬쩍 다시 돌아왔다.
김 감독은 곧바로 소리쳤다. “너 뭐하는 놈이야. 필요없으니 당장 나가.”
임창용은 깜짝 놀랐다. 지금껏 자신에게 그처럼 심하게 대하는 감독은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150km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직구를 사이드암으로 던지는 유망주를 다짜고짜 혼낸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진짜 야구를 그만두면 큰 낭패이기 때문이다.
임창용은 몸이 달았다. 훈련이 끝난 뒤 김 감독의 숙소를 찾아가 방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기를 세시간 여. 김 감독은 그제서야 임창용을 불러들였다.
방에 마주 앉아서는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그가 얼마나 좋은 투수인지, 열심히 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얘기해주며
자상하게 타일렀다. 이후 임창용은 훈련에 매진했고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로 성장했다.
김 감독은 “그때 임창용이가 오래 안 기다리고 가 버리면 어떻하나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며 너털웃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말썽쟁이들을 대하는 김 감독의 노하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카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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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초 - 말괄량이 길들이기②
김성근 감독이 신윤호를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LG 2군 감독에 취임하면서였다. 그때만해도 신윤호는 LG에서 가장 속을 많이 썩이는 선수였다.
신윤호는 150km를 던질 수 있는 당시만해도 매우 드문 ‘파이어 볼러’였다.
그러나 신윤호는 만성적인 제구력 불안으로 수년째 유망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가장 답답한 것은 신윤호 본인이었다. 그는 어느새 술로 쓰린 속을 달래는데 익숙해졌다.
그리고 술을 이기지 못해 크고 작은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그러나 김 감독을 만난 신윤호는 전혀 다른 선수가 됐다.
2001년 김 감독이 1군 감독대행으로 올라오며 마무리를 맡게 됐고 1년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3관왕(다승,구원,승률)을 차지했다.
그 비결은 바로 믿음이었다.
신윤호는 “다들 내게 “네 공은 한 가운데 던져도 못친다”거나 “맞아도 좋으니 정면승부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맞으면 말을 바꿨다. 1군에 잠깐 올라갔다 미끄러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언젠가부터 마운드에 서면 벤치를 쳐다보는 것이 버릇이 됐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님은 달랐다. 정말 맞아도 뭐라 안했다. 한번 무너져도 다음에 또 나를 위기 때 썼다.
마운드에 오를수록 자신감을 갖게 됐다. 공 하나 던지고 벤치 쳐다보던 버릇도 어느새 사라졌다”고 놀랄만한 변신의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신윤호가 말썽을 일으키는 일도 사라졌다.
이후에도 술을 먹긴 했지만 가슴 속 응어리가 사라지니 술의 힘을 빌어 감정을 폭발 시킬 필요도 없었다.
신윤호는 아직 그때의 영광을 재현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더 이상 방황하는 일은 없다.
믿음의 토대 위에 놓여진 2001년의 성공이 그의 정신을 한층 성숙시켰기 때문이다.
LG 포수 조인성은 말썽쟁이와는 거리가 먼 선수다. 순한 인상처럼 행동도 부드럽고 크게 어긋나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 감독 입장에선 조인성 역시 속 썩이는 선수 중 하나였다. 좋은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가 따로 집계하지는 않았지만 조인성은 김 감독 재임기간 동안 가장 많이 혼이 난 선수로 선수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조인성은 강한 어깨를 지니고 있는 대형 포수 유망주였지만 투수 리드에 있어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포수의 역할을 강조하는 김 감독 입장에선 그의 성장이 절실했고 그만큼 사랑의 매가 많이 가해졌다.
2군으로 떨어트려보기도 하고 지방 원정지에서 짐을 싸 서울로 보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인성은 눈에 띄게 나아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잠실에서 KIA와 경기를 하고 있었다. 김 감독은 경기 전 조인성에게 절대 서두르지 말 것을 지시했다.
당시 흐름상 점수를 좀 주더라도 후반부에 승부를 걸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5회초 LG 수비. LG는 1점차로 앞서 있었지만 투수의 제구력이 흔들리며 주자가 모였다. 위기였다.
김 감독은 마음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급한 건 저쪽이다. 무리해서 승부 하지 마라.’ 경기 전 조인성에게 주문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그러나 조인성은 김 감독의 마음과 정 반대로 리드를 펼쳤다.
스트라이크 잡으러 들어가기 급급하다 그만 결정타를 얻어맞고 말았다. 흐름은 KIA 쪽으로 넘어갔고 승부도 그걸로 끝이었다.
공수가 교대되자 김 감독은 조인성을 덕아웃 뒤로 불러세웠다. 그리고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이 돌대가리 같은 놈아. 언제까지 너 위주로 리드를 할거냐. 포수는 엄마처럼 투수를 감싸고 이해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냐.”
경기 중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좀처럼 감독 의자에서 움직이지도 않는 김 감독이다.
그런 그가 경기 중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는 건 큰 사건이었다. 조인성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가 났을 터.
조인성은 속으로 홀로 생각했다. ‘오늘 또 짐 싸서 구리(2군 훈련장)로 가야겠구나…’
그러나 그날도 그 다음날도 그에게 2군행 지시는 내려지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그리 크게 혼이 났으니 충분히 반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인성이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해 온 만큼 길도 찾아낼 수 있을거라 믿었던 것이다.
다음날 조인성의 이름은 2군행 선수 자리가 아닌 스타팅 라인업에 들어 있었다.
김 감독은 “정말 크게 혼을 냈을때 2군까지 내려 보내면 선수가 받는 충격이 훨씬 커질 수 밖에 없어. 잘되게 하려고 혼내는거지 내 화를 풀려고 내는게 아니니까. 그때 이후론 인성이를 더욱 중용했어. 결국은 해낼거라고 믿고 있었거든. 인성이도 보다 책임감을 갖고 잘 해줬고. 덕분에 한국시리즈까지도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김 감독과 조인성이 한 유니폼을 입었던 것은 2002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조인성은 여전히 때가 되면 김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있다.
‘미운 정이 쌓이면 고운 정보다 더 무섭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5회말 - '장점을 먼저 생각하라'
2007년 SK는 ‘전원 야구’를 앞세워 전체 선수들의 고르게 기용했다. 붙박이 주전 선수가 거의 없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선발 라인업에 오르는 선수들의 얼굴과 순서가 바뀌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정경배 이호준 최정은 거의 매일 선발로 출장했다. 이 중 정경배는 논란의 대상이 됐다.
공격력 때문이다. 정경배는 올시즌 타율이 2할3푼5리에 불과했다.
정경배의 중용으로 지난해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정근우는 유격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정근우의 유격수 수비에 부족함이 많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을 장점에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은 타율은 수비에서의 효과와 높은 득점권 타율이 보완해준다 여겼다.
김 감독이 고려한 것은 정경배의 경험과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었다. 정경배는 심성이 고운 선수다.
그와 삼성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이승엽(요미우리)은 “나는 이제껏 경배형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고 까지 말한 바 있다.
여기에 타고난 성실성까지 갖고 있다. 그는 김 감독의 강훈련에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다.
후배들은 그를 믿고 따르며 그가 잘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 감독은 전체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SK 내야 수비진을 이끄는데 정경배만한 선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수비력도 높게 샀지만 그의 지휘 아래 젊은 내야수들이 전체적인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SK의 페넌트레이스 1위가 확정된 뒤 시즌 최종전이었던 10월6일 대전 한화전.
정경배는 이날 2타점을 추가해 타점에 걸려 있던 옵션을 극적으로 채웠다.
정작 정경배는 “난 경기에 안 나가도 된다”고 했지만 후배들은 달랐다.
어떻게든 정경배 앞에 출루하기 위해 애를 썼고 결국 타점을 올리게 되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냉정한 프로세계에서 선수들의 자발적 지원을 받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김 감독은 정경배가 팀을 앞장서서 이끄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묶어줄 수 있는 숨겨진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정근우의 유격수 전환도 성공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송구나 포구에 아직 가다듬을 부분이 남아 있지만 집중력이 살아있는 유격수 수비는 큰 흠이 없었다.
특히 김 감독은 아시아시리즈가 끝난 뒤 “이번 대회서 정근우가 공격은 물론 수비까지 아주 잘해줬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정근우 수준의 타격과 주루 능력을 갖고 있는 선수가 2루수는 물론 유격수까지 해낼 수 있다는 것은 팀 입장에서 매우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지도자들은 선수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쓴다. 물론 단점을 고치지 않으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없다.
그러나 단점에 집착하다보면 장점까지 묻혀버릴 수 있다.
김 감독은 “아주 도드라진 장점이 있다면 그걸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 단점 고친다고, 또 그 단점이 미워서 쓰지 않는다면 장점까지 묻힌다. 리더가 생각을 바꾸면 낭비되는 자원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장점 살리기의 백미는 2001년 신윤호다. 진흙속에 묻혀 있던 신윤호가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해다.
당시 신윤호를 취재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며 불과 몇 달새 달라진 것은 분명했지만
그 원인을 알아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작 신윤호 본인도 잘 모르고 있었다. “특별하게 달라진 건 모르겠어요. 슬라이더를 다시 배우고 있기는 한데 아주 잘 던지는 수준은 아니고...”
김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로 단번에 팀의 마무리 투수 자리를 꿰찰 수 있었지만
단순히 믿음 만으로 투수 부문 3개 타이틀(다승,구원,승률)을 거머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니 당시 신윤호의 깜짝 활약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신윤호가 했던 말 중에 힌트가 있었다. 해답은 슬라이더였다.
김 감독은 2000년 말 LG 2군 감독에 취임한 뒤 신윤호에게 슬라이더를 좀 더 가다듬으라고 지시했다.
이전까지 그를 지도했던 코치들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신윤호는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나빠 실전에선 어려움을 겪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1994년 입단 이후 대부분 코치들은 신윤호의 제구력을 잡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러나 신윤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 감독은 뜬금없이 슬라이더 장착부터 지시했던 것일까.
‘제구가 나쁘다’는 단점을 고치기 보다 ‘공이 빠르다’는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다.
당시만 해도 신윤호는 타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공이 빠른 투수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을 던지니 맘 놓고 타석에 서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좀 엉성해도 스트라이크 잡을 수 있는 공 하나만 있으면 예측하기 힘든 직구는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다. 타자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는 투수는 그리 흔하지 않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타석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을 (우)타자에게 자신의 몸에서 달아나는 슬라이더는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윤호의 슬라이더는 예리한 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제구를 할 수 있었다.
이전까진 직구 제구 잡는데 온 신경을 쓰다보니 그나마도 써먹지 못했지만 김 감독의 역발상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면 직구를 살살 던질 수 밖에 없던 그다. 그러나 슬라이더를 활용하면서 직구는 맘 먹고 힘껏 던질 수 있었다.
그동안 마운드에만 서면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타자는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있음을 알게된 것도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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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초 - '최고'들의 스승으로 사는 법
김성근 감독은 2002년 LG에서 물러난 뒤 2007년 SK 감독을 맡을때 까지 5년간 공백이 있었다.
지바 롯데 코치를 했던 2년을 빼도 2년간은 완전한 야인 신세였다.
그러나 김 감독의 존재감은 계속됐다. 그 사이 굵직한 제자들이 여럿 생겼기 때문이다.
박찬호(LA 다저스) 김병현(플로리다) 이승엽(요미우리) 등 한국을 대표하는 별들이 줄을 이어 그의 야구를 전수받았다.
박찬호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최고를 경험했고 이승엽은 일본에 한국 야구의 혼을 심었다.
김 감독의 무엇이 이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일까.
첫 단추는 ‘존중’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들이 이제껏 해낸 성과와 노하우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교육을 시작했던 것이다.
박찬호가 김 감독에게 처음 도움을 청한 것은 2003년 말이었다. 박찬호는 지인을 통해 김 감독에게 지도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때 김 감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 내 정보망을 동원해 좋은 투수코치와 훈련장소를 찾는 일이었다.
야인이던 김 감독에게 ‘박찬호 과외’는 자신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나 김 감독은 자신을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다소 의아해하는 필자에게
“내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야. 대한민국 최고인데 함부로 하면 안되지. 가르친다기 보단 같이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라고 답했다.
김 감독의 계획은 갑작스럽게 변한 박찬호의 스케줄 탓에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박찬호와 첫 대면부터 지금까지 그때의 마음 그대로 대하고 있다.
이승엽과 함께 생활했던 2005년. 김 감독은 올라오는 상대 투수마다 뚫어져라 폼을 관찰했다.
구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투수의 폼 속 버릇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종이에 적어 직원을 통해 이승엽에게 전했다.
호흡이 잘 맞아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김 감독의 또 하나의 보람이었다.
그러나 늘 김 감독의 메모가 전달된 것은 아니었다. 간혹 처음 접힌 그 상태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이승엽이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냈을 때였다.
김 감독은 “승엽이도 버릇을 잡아내는 좋은 눈이 있어. 그럴 때 괜히 내가 본 것이 더해지면 헷갈릴 수 있잖아. 그럴땐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열정과 진실이다.
김 감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로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며 진심으로 그들의 성공을 기원했다.
박찬호와 잦은 만남으로 신뢰가 쌓여가던 어느 겨울. 김 감독은 박찬호와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야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김 감독은 박찬호의 투구판 밟는 버릇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을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까지 벗고 투구폼을 보여줬다. 그저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김 감독은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창피했는데 그땐 그런 생각도 없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승엽에게도 그 열정은 이어졌다. 이승엽이 좀처럼 페이스를 찾지못했던 2005년 시즌 초. 김 감독은 매일 경기 후 이승엽에게 특타를 시켰다.
좋은 폼을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에게 방패막이 돼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치 회의에선 이승엽의 부진에 대해 이런 저런 처방들이 나왔다. 그때마다 김 감독은 “기다려달라”며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승엽이 가뜩이나 힘에 겨운 상황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다간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타는 그들의 오만을 향한 소리없는 외침이기도 했다. 그들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선 이승엽이 갖고 있던 것을 찾는 수 밖에 없었다.
스윙을 하는 이승엽도 볼을 던져주는 김 감독도 파김치가 되는 밤이 계속됐고 오래지 않아 그들은 목표한 바를 이루어냈다.
김 감독이 얼마나 세심한 것 까지 신경 썼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이승엽이 2005년 한참 주가를 올리던 5월 무렵, 김 감독이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일이다.
지인과 술자리를 하던 중 김 감독에게 이승엽의 전화가 왔다. 결승 홈런을 치며 히어로 인터뷰까지 했다는 기쁨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김 감독은 지인에게까지 전화기를 건네주더니 수화기를 막고 “정말 잘했다고 크게 칭찬해주라”고 부탁했다.
지인은 한술 더 떠 “올해 잘하면 보너스 받아 술 한잔 사라”고 했다.
김 감독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통화가 끝나고 김 감독이 말했다.
“지금 말 실수 한거야. ‘잘하면’이 아니고 ‘잘한다’고 했어야지. 승엽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한다면 앞으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
김 감독은 최고들의 스승으로 사는 소감(?)을 묻자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유? 그런건 잘 모르겠어. 그저 내가 맞고 틀리고, 잘 하고 못하고 보다 그 선수들하고 나하고 마음이 맞은거 아닌가 싶어.”
*덧붙이기 : 이승엽이 일본으로 가기 전인 2003년 말. 모 스포츠용품 회사 행사장에서 필자와 김 감독에 대한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대화의 앞 뒤가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이승엽은 “어휴, 김성근 감독님한테 배우면 하도 뛰어서 애들 무릎 다 나간대요”라고 말했고 우린 함께 낄낄 거렸다.
그리고 2007년. 이승엽은 한 인터뷰서 “만약 한국에서 뛰게 된다면 김성근 감독님의 팀에서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을 향한 진심은 언젠가 통하기 마련이다.
6회말 - 지바에서 배운 미소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어느 날. 김성근 당시 LG 감독과 어윤태 구단 대표가 서울 시내 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김 감독은 이 자리에서 어 대표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덕아웃에 나와 선수들하고 하이파이브도 하고 싶고 했을텐데 나 때문에 못했죠. 미안합니다. 올해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이때 어 대표의 답이 그 유명한 “올해 야구는 LG 야구가 아니라 김성근 야구였소”였다. 그러나 이번에 말하고픈 내용은 해임사태과 관련된 것이 아님으로 이쯤에서 갈무리.)
어 대표는 매우 열정적인 인물이다. 90년대 초 단장 시절 ‘신바람 야구’로 불리던 LG 야구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나름 일조를 했었다.
경기를 이기면 선수들과 어울려 기쁨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김 감독은 어 대표가 덕아웃에 나타나는 걸 꺼렸다.
‘신바람 야구’라는 허상은 LG 야구를 단단하게 만드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고 프런트에서 선수단에 간여하는 모양새 자체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2007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김성근 SK 감독은 구단측에 한가지 제의를 했다. “승리는 모두의 힘이 모아져 이룬 것인 만큼 다 함께 기뻐하자.”
구단 직원들은 어색해 했다. 김 감독의 스타일을 잘 아는 만큼 괜히 부담이 되면 어쩌나 싶어 머뭇거렸다.
그러나 김 감독은 진심으로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모두가 함께 즐기기를 원했고 시간이 흐르자 모두가 자연스럽게 기쁨을 함께 했다.
김 감독의 변신은 2년간의 지바 롯데 코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밸런타인 감독이 만들어 놓은 팀 분위기가 그를 바꿔놓은 것이다.
김 감독이 롯데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김 감독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인사 하는게 너무 힘들어.”
김 감독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스무살 이후 40년이 넘도록 한국에서만 살았다. 우리 문화가 훨씬 더 익숙할 수 밖에 없다.
‘인사는 하루에 한번’이 우리네 상식.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5분 전에 봤던 사람도 또 만나면 꾸벅 인사를 건네 왔다. 안부만 묻는 것이 아니었다.
토스 볼을 던져주면 “감사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했고 훈련이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라며 허리를 굽혔다.
한국 감독 생활이 뼈속까지 인이 박힌 김 감독에겐 하루에도 수십번씩 해야 하는 인사가 곤혹 스러웠던 것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선수들에게 “너 좀 전에 인사 했으니 안해도 된다”고 까지 했을까.
고개만 끄덕 하는 정도는 그런대로 할 수 있었지만 상대가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는데 입을 닫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김 감독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꺼내 억지로 억지로 응대를 했다.
곤혹스러움은 오래지 않아 가셨다. 오히려 인사가 조금씩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자꾸 소리를 내면 낼 수록 스스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밝았다. 어두우면 그 속에서 살 수가 없더라. 모두가 쉽게 말이 나온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런데 인사를 하면서 플러스 사고방식이 되더라. 하이 파이브도 하며 털어놓으니 가슴 속에 쌓인 무언가가 풀어지더라. 물론 속내를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속은 속대로 가져간다. 그러나 분명한 건 밝아질 수록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밸런타인 감독의 오버 액션은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밸런타인 감독은 언제나 시끄럽고 동작이 크다.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고민이 뭘까”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그러나 김 감독은 생각이 달랐다. “감독의 눈으로 보면 결국 그도 많이 외롭고 괴로워하더라”며 단지 “표현을 밝게 가져갈 뿐”이라고 해석했다.
김 감독은 “감독은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그걸 침묵하면서 가져갔는데 바비는 달랐다. 담아두는 것은 담아두는 것이고 그 이외 부분은 크게 소리내어 털어내더라. 그런 에너지가 여유를 가져오고 팀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는 걸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9월28일은 SK가 창단 처음으로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은 날이다.
김 감독은 경기 후 축하파티 장소에서 선수들에게 “아까 운동장에서 헹가레 쳐주는 줄 알고 어깨 뒤 파스까지 떼어놓고 준비했는데 아무도 안해주더라”고 농담을 던졌다. 선수들은 그제서야 앞으로 뛰어나와 김 감독을 하늘 높이 올려주며 또 한번 기뻐했다.
예전같았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진지한 얼굴로 “아직 해야 할 일(한국시리즈 우승)이 남아있다”며 자제를 당부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김 감독은 이날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맥주 뿌리기 행사까지 직접 지시해 두었다. 생각도 않던 구단 직원들이 부랴 부랴 행사 준비를 하느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공식 축하 행사가 끝나자 송태일 매니저가 김 감독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고 김 감독의 얼굴은 또 한번 환하게 빛이 났다.
송 매니저가 한 말은 “오늘 선수들이 그냥 집으로 다 가겠답니다. 진짜 기분은 한국시리즈 끝내고 내겠다는데요”였다.
당초 김 감독은 파티가 끝난 뒤 선수들끼리 따로 모여 술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구단에 지원을 요청해뒀다.
정규시즌 1위도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들은 자발적으로 ‘공짜술’을 키핑 해뒀다. 이날 조금 미뤄 둔 기쁨은 한국시리즈 우승 후 눈물과 함께 몸 전체로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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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초 -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7’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숫자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설레임을 품고 있다.
바꿔말하면 ‘7’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인간이 자신의 미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자신의 인생 마지막 퍼즐을 채워낸 뒤 축하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늘 같은 말을 했다.
“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실제로 큰 도움이 됐던 사람들은 물론 그다지 인연이 없었거나 자신에게 해가 됐던 사람들에게도 웃으며 ‘덕분’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는 솔직한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시리즈를 위해 김 감독을 만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을 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말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덕을 본 것 같아. 사람들 때문에 힘든 적도 많았지만 내가 정말 어려울 땐 희한하게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났어. 그런 힘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지 않나 싶어.”
김 감독에겐 왠지 ‘독립군’의 분위기가 풍긴다. 어려움을 스스로 뚫고 모든 것을 이뤄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홀로 잘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젊은 시절 호기롭게 친 사고를 무마시켜 준 형사나 모르고 있던 자신의 병을 찾아 치료해 준 의사 이야기 등등 고마운 사람들의 고마웠던 일들 하나 하나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중 가장 극적이고 흥미로웠던 이야기 두가지를 정리해봤다.
가쓰라고교 3학년 무렵. 김 감독의 가족은 일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한국이 아닌 북한이었다.
당시 재일교포들에게 한참 붐을 이뤘던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기로 했던 것이다.
북한은 재일교포들에게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고 선전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귀가 솔깃한 소식도 없었다.
반면 한국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재일교포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핍박받고 궁핍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김 감독 가족은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다. 이제 만경봉호만 타면 북한 주민으로 새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즈음 김 감독에게 뜻밖의 제의가 온다.
당시 재일동포 야구협회 이사였던 최태황씨가 학교로 찾아와 한국에서 열리는 봉황기 고교야구에 재일교포 선수단으로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김 감독은 무엇인가에 이끌리 듯 그 제의에 응했고 생각지도 않던 한국 땅을 밟게 됐다. 그가 찾은 한국은 듣던 것과는 달랐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한번 해보자는 역동성이 느껴졌다. 따뜻한 환영까지 받고 돌아간 김 감독은 곧바로 가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결국 김 감독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다. 만약 그때 최태황 이사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북한은 그의 인생과도 같은 야구가 거의 흔적만 남아 있는 땅.
김 감독은 “글쎄 뭐가 됐을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특출난 사람은 못됐을 것”이라며 웃어보였다.
'김성근 감독 현역시절 투구 모습. 당시 중앙일보가 최초로 투수의 연속동작을 촬영, 보도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 2004년 어느날. 김 감독은 지바 롯데 사노 코치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는다. “우리 팀 다카이시씨가 한국에 가니 잘 부탁합니다.”
사노 코치는 김 감독이 OB 감독 시절 타격코치로 영입했던 인물. 김 감독은 정성껏 다카이시씨를 도왔고 둘은 금세 가까운 사이가 됐다.
얼마 뒤 김 감독은 다카이시씨에게 비슷한 부탁을 받는다. 다카이시가 부탁한 인물은 바비 밸런타인 지바 롯데 감독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다카이시는 밸런타인 감독의 치프 통역으로 그가 일본에서 가장 믿고 있는 심복 중 심복이었다.
밸런타인 감독이 미국 출신임에도 일본 내 어떤 감독보다 폭 넓은 정보력을 보유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다카이시였다.
마침 그때는 한국의 추석 연휴와 맞물려 있었다.
첫날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식사를 하는 바람에 밸런타인 감독이 계산을 하게 됐고
김 감독은 미안한 마음에 다음날 저녁에 다시 만나 맛난 음식을 대접했다.
밸런타인 감독은 어정쩡한 일본어가 유일한 대화 수단이었지만 ‘야구’라는 만국 공통어는 금세 두 노장의 가슴을 털어놓게 만들었다.
밸런타인 감독은 자신의 강연에 다시 한번 김 감독을 초청했고 그날도 밤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야구에 대해 묻고 답했다.
그리고 얼마 뒤 지바 롯데구단에서 김 감독에게 연락을 해왔다. 코치 영입제의 전화였다.
당시 구단 고위층에 의해 한차례 반려되기도 했지만 밸런타인 감독은 김 감독 영입을 관철시켰다.
그후 2년간 김 감독은 새로운 야구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쌓게 된다.
*덧붙이기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김 감독이 행운이라고 말한 일들의 이면엔 김 감독이 보이지 않게 흘린 땀방울이 있었다.
가쓰라고교 시절, 김 감독은 근처 복싱도장에서 나머지 훈련을 했다.
돈을 낸 정식 수련생은 아니었지만 복싱도장의 잘 갖춰진 훈련 시설을 이용하고 싶어 일을 도와주며 짬짬이 훈련을 했다.
당시 도장을 운영하던 인물이 바로 최태황 이사의 사촌 동생이었다.
관장은 최 이사에게 “우리 도장에 한국계 야구 선수가 한명 오는데 정말 열심히 훈련한다”고 추천했고
그 덕에 재일교포 선수단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이름이 한국식이어서 눈길을 끌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 정도로 운이 좋기엔 일본에 야구하는 고등학교가 너무 많다.
밸런타인 감독과 일화도 그렇다. 당시 김 감독은 밸런타인 감독에게 직언을 많이 했다.
밸런타인 감독이 코치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을 때는 “그건 틀린 말이다. 그런 건 감독이 안고 가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밸런타인 감독은 김 감독과 헤어지며 “당신은 최고 입니다”라는 사인을 선물했다.
그 속엔 ‘나에게 직언을 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란 뜻이 담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7회말 - 가득염의 노트
7회말. 이제 그가 나설 차례다. SK 좌완 스페셜리스트 가득염(38). 그가 처음 SK 유니폼을 입을때만 해도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마흔을 눈 앞에 둔 한물 간 투수정도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득염은 모두의 생각을 보기 좋게 날려버렸다. 시즌 내내 SK 불펜의 왼쪽 날개를 튼실히 지탱하며 팀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특히 한국 시리즈와 아시아 시리즈서 20명의 타자를 맞아 단 1개의 안타만 내주는 빼어난 투구로 빛나는 SK의 가을을 이끌었다.
지난 6월말. 그는 잠시 1군 엔트리서 빠진 적이 있다. 매 경기가 마지막일 수도 있는 노장 투수에겐 두려운 시간이었을 터.
그러나 가득염은 그때도 웃고 있었다. 오히려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혹 더 이상 야구를 하지 못한다해도 얻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김성근 감독과 만남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감독님께 야구 배우고 싶어서 SK를 택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그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야구선수로 보다는 한 인간으로 살 날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가득염은 그러면서 자신의 다이어리를 보여줬다. 지난해 11월 제주 캠프부터 김 감독이 미팅 시간때마다 한 얘기를 적어내려간 수첩이다.
그는 틈이 날때마다 이 수첩을 꺼내보며 마음을 다잡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그려갔다.
SK의 가을잔치가 성공으로 끝난 뒤 가득염의 수첩 속에 담겨 있을 얘기들이 궁금해졌다.
김 감독의 어떤 말들이 야구고 세상이고 겪어볼 만큼 겪어본 노병의 마음에 다시 새로운 싹을 틔우게 한 것일까.
가득염의 동의를 얻어 살짝 그 안을 들여다봤다.
11월1일 제주 캠프 시작되는 날
뜬금없이 설문지가 돌려졌다. 야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을 훈련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의 질문이 있었다.
지금껏 야구를 하면서 처음 해본 경험이었다. 내게 야구는 무엇일까….
11월 8일 제주 캠프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상이 달라보인다. 자기 한계를 규정짓지 말아라. 한계를 그으면 거기까지 밖에 발전하지 못한다. 누가 뭐라하던 신경쓰지 말고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하면 안될 일이 없다.”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때 마다 다시 한번 이 말을 찾아내 읽어본다. 난 실제로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거기가 끝이 아니라 믿으며 땀을 흘렸고 나는 지금도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1월26일 낭고 캠프
감독님이 (윤)길현이를 불러 칠판에 무언가를 적게 했다. 감독님도 책에서 본 얘기라고 하셨다.
길현이가 적은걸 보고나니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변하면 태도가 변하고 태도가 변하면 행동이 변한다.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변한다.
바뀐 인격은 운명을 바꾸고 운명이 바뀌면 인생이 달라진다.”
12월6일 낭고 캠프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발전할 수 없다. 시행착오를 겪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떨어지면 언제든 올라가면 된다. 떨어졌다고 좌절거나 잘 할수 있을까 의문을 갖지 말고 왜 떨어졌는지부터 생각하라. 불가능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안되면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왜’부터 다시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다."
12월7일 낭고 캠프
“재능이나 지식이 없어도 내가 가진 걸 잘 활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 실패가 많을수록 강하다. 고민이 있을때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다. 고민을 이겨내야 한다. 집념을 가지고 할 수 있다고 믿어라.”
12월10일 낭고 캠프
“긴 인생에서 어떻게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럴때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어가라. 잔소리나 나약한 말을 뱉으면 안된다. 묵묵히 그냥 가라. 눈물을 보이면 안된다. 그 길을 걸어갈 때 인간으로서 생명의 뿌리가 깊어진다.”
1월20일 고지 캠프
“승부는 눈물겨운 것이다. 나 하나에 우리 가정은 울고 웃는다. 나 하나의 움직임에 가족이 웃고 운다. 내가 던지는 공 하나에 내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다는 절박함이 있다면 쉽게 던질 수 있겠는가. 고통을 이겨내야 행복해질 수 있다.”
1월24일 고지 캠프
“‘보통 선수’는 안된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더 나은 선수’는 안되는게 있으면 그걸 고치겠다는 열정을 갖고 있다. 고치겠다고 마음 먹으면 달라질 수 있다.”
내 보직은 좌타자만 상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 그러나 그 틀에 그냥 나를 가둬놓은 것은 아닐까. 내게 더 높은 목표는 무엇일까.
1월31일 고지캠프
“인생은 내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니다. 오늘 일은 오늘 끝내라. 내일로 미뤄두면 진다. 하루를 살더라도 목표 의식을 갖고 부딪혀라. 뒤로 넘기지 말고 그날 고민은 그날 해결하라.”
2월5일 오키나와 캠프
“큰 나무엔 가시가 없고 가지도 적다. 그러나 작은 나무일수록 가시가 나고 가지도 많아진다. 자신감을 갖고 크게 가는 사람은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없다. 여기 저기 신경을 많이 쓰고 휘둘리는 사람은 자잘하게 자랄 수 밖에 없다.”
2월10일 오키나와 캠프
“기회는 언젠가 분명히 온다. 내 것을 확실히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처음 가졌던 목표를 마무리 지어 놓지 않으면 기회가 왔을때 허둥댈 수 밖에 없다. 연습량이 많다고 만족하지 말라. 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내 것을 찾고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는 한번 하고 나면 버릇이 된다. 할 수 있을지 걱정하지 말고 된다고 마음먹고 부딪혀라.”
가득염은 수첩을 덮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후배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너무도 절실하게 다가왔다. 야구를 끝내야할지도 모르는 벼랑 끝에 서 봤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감독님이 어렵다.
살갑게 얘기를 해 본 기억은 없다.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늘 기대를 갖게 된다. 또 무언가 좋은 길을 보여주실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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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초 - 사자의 새끼를 키우는 법
지난해 이맘때 쯤 일이다. SK 슈퍼루키 김광현(19)이 낭고 마무리캠프에서 첫 불펜 피칭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감독은 기분 좋게 이미 맥주 한잔을 하고 있었다.
김 감독은 “내가 맡아 본 신인 투수 중 최고다. 류현진(한화) 만큼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례적으로 “내가 말한 것을 써도 좋다”고까지 덧붙였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LG 감독이던 2002 시즌을 앞둔 오키나와 캠프때 김 감독은 한 선수를 두고도 비슷한 얘길 했었다.
“걔가 배팅을 치면 그물망 주위로 양준혁 김재현도 모여든다. 확실히 치는 재주가 남달라. 잘 키우면 재밌어질 것 같아.”
주인공은 박용택(28)이었다.
다만 처방이 조금 달랐다. 김 감독은 그때 담당 기자들에게 “일단 내 얘기는 쓰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부탁했었다.
얼마 뒤 이유를 알게 됐다.
박용택이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처지가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감독이 노발 대발하며 크게 나무랐다는 것이었다.
훈련태도가 태만해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박용택은 이후 며칠동안 훈련장 주변만 맴돌아야 했다.
다시 이를 악문 뒤에야 다시 방망이를 잡고 맘껏 땀을 흘릴 수 있었다.
그해 박용택은 타율 2할8푼8리 9홈런 55타점 20도루를 기록하며 신인답지 않은 매서운 활약을 펼쳤다. 당시 LG 주전 좌익수는 그의 차지였다.
주위에선 이를 놓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 감독의 야구 보는 눈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좋은 재목인데 선수도 아니라며 쫓아내려했었다. 그런 선수가 저리 성장했으니 할 말이 없는 것 아니겠냐”며 비아냥 거렸다.
그러나 그건 김 감독의 노림수를 모르고 한 말이었다. 김 감독은 박용택을 크게 꾸짖은 날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가만 지켜보니 자극이 필요한 스타일이더라. 그냥 잘 한다고 나두면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겠더라고. 이제 다시 지켜보는 일만 남았어.”
김광현은 반대였다.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았다. 투구 폼에 문제가 보였지만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던지는 이유를 묻고는 김광현이 “예전부터 이렇게 던져 지금이 편하다”고 답하자 그냥 내버려뒀다.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시즌이 시작되고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부족한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는 본격적인 지도에 나섰다.
그리고 8월19일. 김광현은 이날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김광현은 이날 광주 KIA전서 초반에 무너진 김원형을 대신해 1회부터 마운드에 올랐다.
이미 경기가 기운 상태였기에 5회정도면 충분히 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광현에게 “이미 이렇게 된거 끝까지 던져보라”고 주문했다. 결국 김광현은 7회까지 139개의 공을 던진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한국시리즈의 영웅으로 거듭 난 김광현은 시리즈가 끝난 뒤 스포츠 2.0과 인터뷰서 “처음엔 이유를 몰랐는데 던지면서 알게 됐다. 힘을 빼고 공을 던지는 것이 어떤건지 느끼게 된 경기였다”며 “끝까지 믿어주신 감독님 덕분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젠 그 뜻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언뜻보면 박용택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다. 그러나 속내는 같았다. 스스로 어려움을 겪어보며 뭔가를 느껴보라는 것이었다.
김 감독은 모든 선수에게 일부러 어려움을 안겨주지 않는다.
밑에서부터 한단계씩 올라오는 선수들에겐 좀처럼 훈련시간을 빼가면서까지 혼을 내지 않는다.
잘못이 눈에 띄면 반대로 훈련을 더 시키는 방법으로 꾸지람을 대신한다.
당장 눈에 띄는 부족함이 있는 선수는 일단 그 부분을 보충하는데 온 힘을 쏟는데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김광현처럼 경기 중에 느끼도록 기회를 주는 경우도 드물다.
올시즌 김광현과 같은 방식을 쓴 선수는 채병룡(5월29일 잠실 두산전-140구)이 유일했다.
시련은 한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인생이란 그릇을 찌그러트리기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용택과 김광현은 김 감독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은 최고의 재목들이었다.
그들의 내성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선수들과는 또 다른 접근을 했던 것이다.
박용택은 2002년 KIA와 플레이오프서 홈런 2개를 치며 MVP를 차지했다.
공식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인터뷰 룸 앞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을 때 그동안 묻고 싶었지만 참아왔던 것을 물었다.
“스프링캠프서 감독이 집에 가라고 호통쳤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솔직히 제가 위에서 좀 눌러줘야 잘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많이 힘들었지만 그 다음부터 계속 긴장하면서 지낸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감독님께 감사하죠.”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우선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트린다고 한다. 그 언덕을 스스로의 힘으로 기어오르는 새끼를 키우기 위해서다. 강하게 클 수 있는 자식일수록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정글의 논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김성근 감독이 박용택과 김광현을 키워내는 모습을 보면 사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8회말 - '그른 것과 타협하지 말라'
김성근 감독은 지난 5일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출국에 앞서 최태원 SK 그룹 회장을 만났다. 최 회장이 SK 와이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김 감독은 이 자리에서 최 회장에게 “제가 올해 기록 하나를 세웠습니다. 감독 맡고나서 처음으로 구단하고 싸우지 않고 시즌을 마쳤습니다.”
선수단 운영을 감독인 자신에게 맡겨두고 마케팅 등 야구 이외의 부분에 전력을 기울여 준 신영철 사장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최 회장은 잠시 당황해 했지만 이내 감독의 뜻을 이해하고는 슬쩍 미소를 보였다.
그의 말처럼 김성근 감독은 구단과 마찰이 잦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괜히 그래보이는 것이 아니다.
실제 숱한 의견 충돌이 있었고 이 같은 갈등은 실적을 올리고도 팀을 떠나야 하는 비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김 감독은 한번도 야구인으로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 감독은 “돌이켜 보면 내가 너무 심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야구하는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풍토가 있다. 그런 것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크고 작은 갈등의 요체는 야구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김 감독의 구상을 이해못하거나 혹은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에 빚어진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태평양 감독이던 1989년. 김 감독은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등 신인급 선수들을 모두 10승 투수로 키워내며 팀을 일약 포스트시즌까지 끌어올렸다.
비록 준플레이오프서 무릎을 꿇었지만 침체됐던 인천야구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시즌 후 구단은 뜻밖의 지시를 내린다. 고참 투수 임호균을 방출시키라는 것이었다.
마운드에 세대교체가 됐으니 힘 떨어진 노장은 정리하자는 뜻이었다. 그해 임호균은 승리 없이 1세이브(1패)만을 기록했다.
김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해를 준비하기 위해선 필요한 전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김 감독이 임호균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크게 두가지 였다.
우선 신인급 선수의 ‘불꽃놀이론’ 이다. 김 감독은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을 ‘불꽃놀이’에 비유하곤 한다. 화려하고 보기 좋지만 길게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최소 3년 정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줘야 확실한 전력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 지론이다.
실제로 이듬해 태평양 젊은 어깨 3인방은 89년보다 성적이 모두 떨어졌다. 10승을 넘긴 것은 박정현(13승)이 유일했다.
두 번째론 전략적 등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이 89년 태평양을 강팀으로 이끈 것은 구단별로 특정 투수를 등판시키는 변칙 작전이 잘 먹혔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그해 양상문(현 LG 투수 코치)은 9승을 거뒀는데 대부분 롯데전서 거둔 승리였다.
당시만해도 선발 로테이션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했던 때다. 또 팀 수가 적어 상대 경기수가 많았다.
선발 등판 후 쉬는 간격이 불규칙해 지더라도 특정팀에 강한 투수를 투입해 승률을 높였다.
그 결과 최강 해태(6승2무12패)를 제외한 5팀을 상대로는 모두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반드시 구멍을 메워줄 투수가 필요하다. 선발 등판 기한을 늘일 순 있어도 너무 줄일 순 없기 때문이다.
일정상 생긴 빈 틈을 채워줄 선수가 필요했다.
김 감독은 임호균이 적격이라 여겼다. 경험이 많은 만큼 불규칙한 등판 간격에도 잘 적응할 수 있다 여겼다.
선발이 안되면 중간 계투로라도 나서 다른 투수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인천 야구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만큼 질때 지더라도 팬들에게 어필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단은 완강했다. 김 감독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격한 싸움 끝에 나온 것이 ‘각서 파동’이다.
“임호균이 5승을 거두지 못하면 벌금으로 300만원을 내겠다”는데 서명한 뒤에야 일단락이 됐다.
구단은 집요했다. 이후 “5승 모두 선발승이어야 한다”는 수정 제안을 하더니 코치들을 통해 “임호균을 등판시키지 말라”고 조장하기까지 했다.
팀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임호균은 결국 90년 1승도 거두지 못했고 김 감독은 스스로 물러나 버렸다.
2002년 LG에서 물러났을 때 표면적으로 구단이 요구했던 것은 코치 선임 문제였다.
꼴찌 후보에서 일약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지만 돌아온 것은 “LG 야구가 아니었다”는 뜬구름 잡는 질책 뿐이었다.
LG 구단은 김 감독에게 “1군 코치는 알아서 하지만 2군은 구단이 정하겠다. 일본인 코치도 줄이고 새로 영입하겠다는 3명의 코치 중 1명만 받겠다”고 통보했다. 김 감독은 단호하게 맞섰다. 결국 오랜 실랑이 끝에 결국 해임 통보를 받았다.
세월이 어느정도 흐른 뒤 김 감독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감독님이 참았다면 어땠을까요. 3명(코치)을 살리기 위해 너무 많은 걸 포기한건 아닐까요. 남아서 싸웠다면 LG 야구가 더 달라질 수도 있었을텐데요.”
김 감독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때 내가 굽혔으면 LG 감독 수명은 연장됐겠지만 오야(리더)로서는 끝이 났을 거야.
내가 옳지 않은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물러설 순 없잖아. 그동안 날 믿고 따르던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어.
2002년 만큼 날 따랐을까. 당장 눈 앞에 것을 잡으려고 작은 걸 탐내면 더 큰 걸 잃게되는 거야”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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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초 - 잠들지 않는 야인(野人)
8회말에 언급했던 것처럼 김성근 감독은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선 대쪽같은 소신을 앞세워 당당하게 맞섰다. 당연히 구단과 충돌이 잦았고 2002년 LG에서처럼 실적을 내고도 해임되는 일도 생겼다.
자연스럽게 야인으로 지내는 시간도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야구를 떠나본 적은 없다. 그의 야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력에 의해 밀려나게 되거나 할땐 야구가 지겹거나 짜증스러웠을 만도 하건만 멀찍이 도망가거나 일부러 외면해본 적은 없다.
감독으로 지낼 때나 유니폼을 벗었을 때도 그는 늘 야구와 함께 했다. ‘야구인’ 김성근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가장 활발히 하는 활동은 아마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이다. 전국에 퍼져있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달려가 힘을 보태준다.
소문이 퍼져 생면 부지의 지도자들로부터도 연락이 오곤 하지만 그때도 두 번 생각 할 것 없이 짐을 꾸려 떠난다. 심지어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의 지도 요청을 받아들여 하루 종일 땀을 흘린 적도 있다.
2002년 11월 LG에서 해임된 이후 2년간의 행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인스트럭터로 성균관대 오키나와 전지 훈련에 합류해 선수들을 지도했었다.
김 감독을 아끼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김 감독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수도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길을 고생스럽게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감독 자택인 성수동에서 수원 성대 야구장까지는 지하철로 왕복 3시간(김 감독은 아직 차도 운전 면허도 없다)이나 걸렸다.
김 감독의 회갑연을 주도하기도 했던 김기태 요미우리 코치는 “감독님이 학교 가는 건 이제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 이제 한국 야구의 큰 어른으로 대접만 받아도 모자란데...”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꿈쩍도 않았다. “가끔 사람들이 알아보고 “왜 지하철 타고 다니세요”라고 묻기도 해. 하지만 난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부끄러울 일이 뭐가 있나”라며 묵묵히 계속 그 길을 갔다.
장외 지도자로의 왕성한 활동은 인연의 끈을 길게 이으며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2002년 LG서 잠시 한솥밥을 먹었던 이상훈(은퇴)의 경우 서울고 시절 40여일간 김 감독의 지도를 받았었다.
김 감독은 이상훈이 2002년 미국 생활을 마치고 LG로 복귀했을 때 인사차 찾아 오자 “너도 남자고 나도 남자다. 남자끼리는 많은 말 하는 거 아니다. 서로 알아서 하자”고만 한 뒤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김 감독은 이상훈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이상훈은 필요할때마다 마운드에 올라 승리를 지켜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둘 사이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인 생활의 남는 시간은 언론사 해설위원과 야구팬과의 만남으로 채워진다. 해설위원(혹은 객원기자)는 감독을 그만두면 으레 거쳐 가는 코스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마저도 매우 열정이 넘친다.
야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 수 있는 기회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일반 팬부터 자신보다 연배가 아래인 제자급 지도자들까지다.
해설위원으로 관전평을 쓸 때는 선수의 장.단점을 세세하게 분석하는가 하면 그날 경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은 눈치 보지 않고 철저하게 지적했다. 때로 그의 글이 현장 지도자들의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소신껏 밀어부쳤다.
성의없이 슬쩍 스쳐보고 쓰는 글이 아니었다. 스포츠 투데이 해설위원 시절 있었던 일이다. 한국시리즈 4차전이 끝나고 중간 점검을 할 수 있는 글을 부탁했을 때 그는 이런 내용을 보내왔다.
“4차전까지 현대 선발 투수들은 452개의 공 중 370개의 공을 바깥쪽으로 승부했다. 그 중 00%가 변화구였는데...” 그때 데스크를 보던 선배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는 “야, 이거 정말 세어보고 쓴 걸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 감독은 감독의 입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꼼꼼하게 기록하며 원고를 준비했다. 그가 관전평을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의 데이터를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팬들을 향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다가선다. 세미나나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가능한 짬을 내 참석하려 한다.
김 감독은 2004년 명지대학교 기록과학대학원 초빙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돈이나 명예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강사료는 강의 후 학생들 맥주 한잔만 사줘도 모자랐고 야구인으로서 명예를 더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김 감독은 결강 한번 없이 학기를 모두 마쳤다. 실제 기록의 활용법을 알려주기 위해 전력분석팀에서 일하는 제자를 불러 특강까지 했다.
야구가 단순히 치고 던지고 달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꼭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속의 흐름을 궁금해하고 알고싶어하는 팬들이 늘어날수록 한국 야구기 비옥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참고삼아 김 감독이 2003년 명지대 특강때 팬들에게 했던 강의 내용 몇가지를 전해본다.
15타수 5안타라는 기록이 있다고 치자. 3할대 타율이다. 야구는 실패하는 스포츠라는 것이 이런 점이다. 다른 스포츠는 7할을 성공해야 한다고 하는데 7할을 실패해도 어깨에 힘줄 수 있다는 점은 야구의 재미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타율을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점수 차이,안타 내용, 직선 타구나 아니냐, 타구의 방향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데이터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선동렬과 송진우는 번트 수비에 능한 투수다. 송진우는 상대가 번트를 하려들면 구속을 줄여 들어가고, 선동렬은 그대로 던지는 편이다. 이럴 경우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송진우의 경우에는 버스터가 용이하고, 선동렬의 경우에는 번트앤드런을 해보는 것도 괜찮다. 번트앤드런을 쓰는 것은 선동렬이 번트 수비에 자신이 있는 탓에 때로는 포수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수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역이용한다면 타자와 주자가 모두 살 수 있다.
KIA 타이거즈 포수 김상훈을 보자. 도루저지율이 좋은 선수다. 2002년 LG 감독때 그 선수에게 14번을 도루 시도했는데 겨우 3번만 성공했다. 근데 그 3번이 모두 마르티네스였다. 마르티네스의 도루를 살펴보니, 볼카운트가 모두 볼카운트 0-1이었다. 가만히 따져보니 0-1상황에서는 스트라이크 잡느라 주자 견제에 미흡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KIA와 플레이오프서 이 점을 파고들어 좋은 성과를 거둔 바 있다.
9회말 - '끝은 없다. 시작만 있을 뿐'
지난 3일 부산발 KTX. 김성근 감독은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마음이 급했다.
1년간 누구보다 많이 고생했고 한국시리즈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우승에 큰 힘을 보탠 유격수 정근우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돌아오는 길.
그의 가슴 한켠엔 제자의 큰 행복을 함께 축하해줬다는 기쁨과 함께 고민도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이날은 SK가 코나미컵에 대비한 훈련을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10월29일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 짧은 휴식을 마친 선수들의 컨디션이 못내 궁금했던 것이다.
김 감독은 올라오던 길 전화통화에서 “(신영철)사장도 내려오셨더라. 그럴 줄 알았다면 주례는 사장께 맡기고 나는 훈련 하는데 나가봤어야 하는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며 농담 섞인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1984년 OB 감독 이후 24년만에 거둔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언제나 약팀을 맡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기적을 만들어냈지만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에게 부족했던 마지막 퍼즐을 채운 감격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처럼 그렇게 흥분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실제로 담담했다.
‘큰 일 하나를 끝냈다’는 안도감 보다는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각오가 더 컸기 때문이다. 당장 눈 앞의 목표는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였고 더 멀리는 내년 시즌에 대한 준비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5일 정도 시간이 있었지만 우승의 감격만으로 시간을 보낸 것은 우승 당일,축승회 자리가 유일했다. 이후 며칠간은 우승 관련 인사를 다녀야 했고 남는 시간엔 코나미컵과 마무리훈련 스케줄을 짜는 것으로 채웠다.
김 감독은 선수단 보다 하루 먼저(5일) 일본으로 건너가 지바 롯데 코치 시절 친하게 지낸 지인들에게 부탁해 놓은 주니치 관련 자료를 건네 받기도 했다.
아시아 시리즈서 SK는 비록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예선리그서 일본 챔피언 주니치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김 감독은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대회 폐막 하루 뒤 시코쿠현 고지로 날아가 1.5군 중심의 마무리 훈련을 지휘했다. 물론 도착과 함께 특유의 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김정준 전력분석팀 과장은 “감독님이 오시기 전에도 스케줄이 빡빡했는데 오신 뒤엔 더욱 촘촘해졌다. 선수들이 오히려 기대를 하고 있더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김 감독의 삶 자체가 그랬다.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 목표가 이뤄지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다시 달려간다. 그는 첫 한국시리즈 우승 뒤에도 지금까지와 같은 길을 또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김 감독이 고지 캠프 합류 첫 미팅에서 선수들에게 했던 말은 그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인생에는 시작만 있을 뿐 끝이란 건 없다. 하나를 이뤘다고 거기에 만족하면 거기서 발전이 멈춘다. 작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걸어라.”
김 감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다. 그 속엔 그날 경기와 선수들에 대한 느낌, 자신을 향한 다짐 등이 빼곡히 담겨 있다.
다음은 김성근 감독의 10월29일자 일기다. 사실감을 위해 그의 문체 그대로 옮겨본다.
두산 6차 문학 18시
두산 100 000 001 2
SK 003 000 02X 5
채병룡(5.2이닝) 조웅천(1이닝) 가득염(0.2이닝) 정대현(1.2이닝)
우승. 드디어 했구만. ‘꿈을 현실로’라는 슬로건을 달성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실감이 전혀 없다.
운동장에서 헹가레를 받을때 잠바를 입은 채였다. 홈경긴데 어웨이 유니폼(김 감독은 3차전 승리 이후 징크스 때문에 쭉 빨간색 원정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했다)을 입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뭐 이겼으니 됐다.
유일하게 내가 모자랐던 우승이라는 훈장을 코치,선수,구단,팬의 힘으로, 덕분에 쟁취할 수 있었다. 눈물이 나올지 알았는데 예상 외로 흥분,감격이 없었다.
시즌 1위로 왔기 때문에 질 수 없었던 시리즈였다. 끝나고 보니 ‘아, 다행이구나’하는 안도감이 온다.
인터뷰에서 가족 얘기 했을 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많이 참았다. 진짜로 식구들이 여기까지 많이 뒷바라지 해줬다.
최 오나(최태원 회장)까지 오셔서 같이 기뻐해주셨다. 헹가레도 받고 비루가케(우승 후 서로에게 맥주를 뿌리는 행사)에도 오셨다.
의미 있는 일이다.
참 1년 (다들)수고했다.
2년만에 다시 도쿄돔에 설 수 있게 됐다. 주니치인지 니혼햄인지??
우승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아니다. 이제 또 시작이구나. 승부의 세계란건 참 비정하구나. 시간도 여유도 안 주는구나. 나한테….
지난 겨울 선수들에게 미팅 때 했던 말, “승리는 끝이 아니다. 가는 도중일 뿐이다”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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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못 다한 이야기
황대연 천안북일고 코치는 2002년엔 LG 매니저를 하고 있었다. 시즌 초 그는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십중팔구 전날 술을 많이 먹었거나 일 처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원인 제공자는 늘 김성근 당시 LG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모시기 쉬운 상관은 절대 아니다.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챙기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특훈에 쉬는 날도 없고 스케줄은 바뀌기 일쑤다.
훈련 장소 한번 옮기려면 장소 협의에 식사 문제까지 통째로 바꿔야 한다. 선수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스케줄을 전해주는 것 역시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끔씩이면 참을 만 했겠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니 속이 타들어갈 밖에. 황 매니저는 드러내놓고 불만을 얘기하진 않았지만 고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2002년 당시 LG는 전반기까지 잘 나갔다. 2위까지는 어렵지 않게 차지할 듯 보였다. 그러나 주전 1루수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서용빈의 갑작스런 군 입대와 4번을 치던 김재현의 부상이 겹치며 후반기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결국 쉽게 제친 듯 보였던 두산의 추격을 받아 4위자리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다. 당시 두산은 후반기 초반 급격한 하락세를 보인 탓에 주춤했지만 우즈 김동주 안경현 홍성흔 정수근 등이 쟁쟁하게 버티고 있어 시즌 막판 다시 힘을 냈다. 두산의 뒷심은 LG의 1년 농사를 망쳐놓을 수 있을 만큼 거셌다.
그러던 어느날. 황 매니저와 단 둘이 얘기를 하게 될 기회가 있었다. “이러다 LG가 4강에 가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다들 고생 많이 했는데.” 황 매니저의 답은 귀를 의심케 했다. “감독님이 해답을 갖고 계실 거에요.”
솔직히 황 매니저가 그때까지도 김 감독에게 계속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엔 어느새 김 감독에 대한 믿음이 싹터 있었다. 그해가 지나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인연의 끈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다.
프롤로그 때 밝혔 듯 김재현도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비슷한 말을 했다.
올 한해 누구보다 맘 고생이 심했던 그이지만 감독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진 않았던 것이다.
김 감독은 그런 사람이다. 결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겐 기대를, 적으로 만난 이들에겐 두려움을 안겨준다.
처음엔 김 감독을 받아들이지 않던 사람들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 감독이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 그의 리더십의 처음과 끝은 ‘사랑과 정열’이다.
예전 모 드링크 광고처럼 ‘사랑과 정열’을 제자들에게 모두 쏟아 붓는다.
김 감독은 얼마 전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잘한 게 있다면 그건 선수들을 남의 자식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야.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어. 그러니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있나. 아무리 아파도 걔들 훈련할 땐 빠진 적이 없어. 그러다보면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 내 마음을 알아준 선수들한테 고맙지.”
*덧붙이기
개인적으로 키무라 코이치씨가 네이버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서 SK가 주니치에 패한 뒤 칼럼에서 “김성근 감독은 과연 경기 후에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까요? “SK의 건투”에 기뻐하며 행복한 단꿈을 꾸었을까요? 필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필자는 김성근 감독이 분한 마음에 술을 퍼마신 후, 그래도 잠자리에 들 수 없어 밤을 지새우고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쓰셨더군요.
키무라씨가 제 글을 보게 될 진 모르겠지만 그날 얘길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코나미컵 결승전이 끝난 다음날 아침 9시쯤,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국에 들어간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죠.
김 감독은 실로 오랜만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시더군요. 김 감독의 잠긴 목소리를 듣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술을 먹은 다음 날이면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몸을 추스르기 때문이죠. 선수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그만큼 싫어합니다.
전날 음주량이 어느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 감독의 마지막 인사는 “(KS 2차전처럼)또 연장 생각하다 졌구만. 아쉬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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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철우, [김성근 장인 리더쉽] (이데일리)